남편과의 결혼은 내게 가장 큰 역경 중 하나였다. 그때 하나님과 얼마나 실랑이를 많이 했는지 모른다. 그러시지 말라고, 정말 받아들이지 못하겠다고…. 그때만 해도 내 마음에 교만이 있었던 것 같다. ‘나는 직책도 사무장이고 많이 배웠는데….’ 계속 하나님께 응답을 구했지만 답은 ‘박 선교사와의 결혼’ 하나였다.
상상해봤다. 만약 내가 지금 하나님의 응답을 거절하고 중국선교를 간다면 어떨까. 막상 생각하니 앞이 캄캄했다. 간다고 한들 내가 어떻게 그곳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기도할 수 있을까 싶었다. 결국 하나님의 응답에 순종하기로 했다.
하지만 또 다른 장벽이 기다리고 있었다. 가족들의 반대였다. 나도 장애가 있는데 나보다 장애가 심한 사람과 결혼을 하게 된 것이 충격이었던 것이다. 게다가 학벌도 재력도 없는 남편을 부모님과 형제들은 용납할 수 없었나보다. 아버지께서 내가 일하는 사무실까지 쫓아와 한바탕 소동이 벌어지기도 했다. 아무리 설득해 봐도 가족들의 마음은 움직이지 않았다.
결국 결혼식엔 우리 가족 누구도 참석하지 않았다. 결혼하고도 한동안은 식구들과 왕래를 안했다. 우리 아버지는 결혼 후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우리 집에 와보신 적이 없다. 결혼은 내 신앙생활의 가장 큰 위기이자 역경이었고 동시에 순종이었다. 우리는 결혼식부터 밥그릇 하나까지 모두 후원을 받아 마련했다. 함께 사역했던 베데스다선교회 식구들이 하나씩 맡아 선물을 해주었다.
결혼하며 남편에게 부탁한 것이 하나 있다. 10년을 기다릴 테니 동역을 위해 필요한 공부를 마쳐달라는 것이었다. 한 번 한다고 마음먹으면 하고야 마는 남편은 그 부탁을 들어주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신혼 시절, 정전이 돼 엘리베이터가 작동을 안 할 때도 불편한 몸으로 15층을 내려가 새벽기도에 갔던 남편은 그 집념으로 공부에 임했다. 검정고시를 준비하고 영어영문학 학사, 대학원 졸업까지 딱 10년이 걸렸다.
결혼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또 한 번의 역경이 찾아왔다. 당시 나는 첫째를 임신한 줄 모르고 종합검진을 받았다. 건강검진 결과 대신 임신결과에 대한 상담을 받아야 했다. 첫 임신의 기쁨도 잠시, 병원에선 ‘아이가 장애아일 확률이 높으니 지우는 것이 좋겠다’는 소견을 전했다. 억장이 무너졌다. 하늘을 바라보며 ‘어떻게 이럴 수 있냐’고 물었다. ‘결혼도 그렇게 힘들었는데 어떻게 또’라며 원망을 쏟아냈다.
장애인 선교 분야에서 일하면서 장애인들의 현실을 잘 알고 있었기에 고민이 더 많아졌다. 주변 사람들도 다들 아이를 떼라고 아우성이었다. 한 동생은 내게 언니만 예수 믿는 거 아니라며 죄책감 갖지 말고 지우는 게 현명한 것이라고 목소릴 높였다.
또 한 차례 깊은 어둠이 깔린 터널을 만난 기분이었다. 역시 기도밖엔 답이 없었다. 하나님께선 내 입술을 통한 고백으로 응답을 주셨다. 이 일을 함께 고민해주던 친구와 만난 자리에서 나도 모르게 “그동안 들어왔던 우려 섞인 이야기들은 하나님이 아닌 사람들의 의견일 뿐이고 하나님이라면 분명 상황을 바꾸실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순간 전에 없던 위로가 마음에 새겨지고 걱정이 사라졌다. 결혼 과정에서 경험한 하나님의 응답과 순종이 연약한 나를 담대하게 한 것이다.
의사는 수술을 위해 5일 후 오라고 했지만 나는 병원에 다시 가지 않았다. 그렇게 아이를 낳기로 결심했다. 출산 후 떨리는 마음으로 소아과 종합검진을 받았다. 다행히 아이는 건강했다. 아빠가 몸이 불편하니 혹 아이를 갖게 된다면 아빠를 도울 수 있는 건강한 남자아이로 태어나길 기도했는데…. 틀림없는 응답이었다.
정리=최기영 기자 ky710@kmib.co.kr
[역경의 열매] 황영희 <5> 나보다 심한 장애인과 결혼에 가족들 충격
입력 2017-03-24 0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