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 직후 대한민국은 ‘미제(美製)’의 세상이 된다. 미국제 엔진을 재활용한 시발택시, 미제 딱지가 붙은 원조·배급용 밀가루, 미군부대에서 버린 먹거리로 만든 꿀꿀이죽…. 굶주리지 않고 잘 살고 싶은 마음은 종종 ‘자유’로 오해됐다. 정비석 소설 ‘자유부인’은 영화화돼 ‘자유’를 물었다. 서구문화도 유입됐다. 서울 명동에는 일서(日書)가 아닌 양서(洋書)가 대세였다. 신문광고의 태반은 할리우드 영화였다.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뜰 거야”라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는 한국인 정서에 딱 들어맞았다.
겨우 살아남은 상황에서 독서는 잉여인간에겐 사치였다. “책 읽기라니, 100환짜리 팥죽, 150환짜리 짜장면 한 그릇도 폼 나게 사 먹지 못하는 주제들이 책 읽기를 얘기하는 것은 개수작이다.” 하지만 다수는 새로운 세상을 맞이하기 위해 책을 붙잡았다. 1940년에 태어난 ‘준’이란 청년은 소설을 닥치는 대로 읽었다. 내면의 허기를 잠재울 수 있는 것은 책밖에 없었다. 그리고 남과 북의 체제 이데올로기 속에서 국가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졌다.
60년대는 혁명의 시대였다. 청년들은 중고생 종합잡지인 ‘학원’과 ‘사상계’를 읽었다. 독서시장을 강타한 건 전집의 붐이었다. 세계문학전집이 쏟아져 나왔다. 일부 전집은 월급의 4배가 넘는 문화상품이었다. 혁명의 프레임이 달라졌다. 5·16쿠데타는 4·19혁명을 학생들의 데모로 격하시켰다. 어른들의 거사인 5·16은 혁명이 됐고 국가재건으로 이어졌다. “무관심 하라”는 환청에 청년들은 삶의 무게를 힘들어했다. 문학판은 얼어붙었다. 또 다른 세상을 꿈꾸던 대학생 ‘정우’는 허무의 현실에서 살아남지 못했다.
첫 국어교과서의 철수와 영희. 철수는 학교에 가지만 영희는 바둑이와 집에 남는다. 60∼70년대의 수많은 영희는 식모, 여공, 버스차장 등으로 잔혹노동에 시달렸다.
영화 ‘초우’의 영희도, 조선작 소설 ‘영자의 전성시대’의 영자도 해피엔딩의 주인공은 되지 못했다. 이 시기에 ‘불란서 시집’을 읽는 소녀가 있었다. 실존을 물었다. 결국 스스로의 삶을 번역하지 못하고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로 남았다. 노동현장에서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를 외쳤던 소년. 독서가 취미였던 그는 애국조회·제식훈련의 국민이 되고 싶었지만 젊은 베르테르처럼 스러졌다.
당대에 어떤 책이 어떻게 읽혔는지를 돌아보면 시대적 풍경이 보인다. 그래서 책 읽기 문화는 시대를 탐색하는 유용한 나침반이다. ‘살아남지 못한 자들의 책 읽기’는 거기에 주목한 독서문화사다. 하지만 책 읽기의 단순한 변천사가 아니다. 50여권의 문학작품은 물론 영화, 대중가요 등 다양한 텍스트를 등장시키고 가난 여성 인권 등 시대상을 짚으며 한국 근현대사의 이면까지 파헤친다.
무대의 시기는 1945년 해방 이후부터 1970년대 유신 체제까지다. 주인공은 문학 또는 현실 속에서 고뇌하고 번민했던, 각각의 시대를 상징하는 ‘청년’ 4명이다. 최인훈 소설 ‘광장’의 주인공 준, 김승옥 소설 ‘환상수첩’의 정우, 수필가 겸 번역가 전혜린, 노동자 전태일이 그들이다. 키워드인 문학을 통해 벌거벗은 주인공들의 삶과 고민을 조명한다.
서술 방식은 독특하다. 시대 변화와 사회 풍속도, 문화사 흐름에 소설, 시, 비평, 신문기사 등이 비빔밥처럼 버무려진다. 본문을 읽어 내려가면서 책 뒤쪽의 주석(14쪽)을 참조해야 이해하기 편한 구조다.
주인공들은 더 나은 세상을 꿈꾸었지만 시대와의 불화로 결국 좌절하고 만다. 우리 현대사의 아물지 않은 흔적이지만 이들이 던진 물음은 역사가 됐다. 새로운 세상을 위해 살아남은 자들의 응답이 필요하다. 저자가 집필을 원점에서 다시 시작한 2014년 4월의 세월호 희생자들을 기억하면서.
박정태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jtpark@kmib.co.kr
[책과 길] “책 읽기 문화, 시대 탐색하는 나침반”
입력 2017-03-24 05: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