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로 만들어졌다면 너무 기구한 이야기여서 현실성이 없다고 여길 듯하다. 열두 살 소년이 원인불명의 병으로 돌연 식물인간이 되고, 4년 만에 의식을 되찾지만 의사를 표현할 수 없어 누구도 이 사실을 발견하지 못한 이야기, 9년간 자신의 몸에 갇혀 암담한 좌절의 공간을 떠돌아다닌 내용….
하지만 이건 진짜로 일어난 일이다. 주인공은 남아프리카공화국에 사는 마틴 피스토리우스(42). 그가 영국 데일리미러 기자 메건 로이드 데이비스와 공동으로 펴낸 이 책은 ‘화분에 담긴 식물처럼’ 살면서도 삶의 끈을 놓지 않았던 한 인물의 ‘분투의 기록’이다. 표지에는 이런 문장이 쓰여 있다. ‘모두들 가망 없는 식물인간인 줄 알았지만 나는 매순간 듣고 느끼고 이해하고 있었다.’
이야기는 의식이 돌아왔지만 어느 누구도 이 사실을 알지 못했던 시절을 회상하면서 시작된다. 모든 걸 느끼는 인간이지만, 어떤 표현도 할 수 없었기에 적잖은 수모를 감당해야 했다. 한 의사는 엑스레이 촬영대에 누워 있는 저자를 보며 이렇게 말했다. 시체 같은 모습이 불가사리를 닮았다고.
하지만 가장 감당하기 힘든 고통은 가족의 절망을 목격할 때였다. 어머니는 마네킹처럼 휠체어에 앉아 있는 저자를 눈물이 고인 눈으로 쳐다보다가 말했다. “네가 죽었으면 좋겠어. 네가 죽어야 해.” 이 말을 듣는 순간 저자는 삶을 그만 내려놓고 싶었다고 한다.
그래도 가족이 있었기에 절망의 터널을 통과할 수 있었다. 스물다섯 살이 됐을 때 그는 가족들과 바다로 휴가를 떠난다. 아버지는 식물인간인 아들을 데리고 바닷물 속으로 들어가더니 “아빠가 네가 떠내려가도록 놔둘 것 같니”라고 물으면서 이같이 말한다. “지난 시간을 어떻게 보냈는데 내가 여기서 너한테 무슨 일이 일어나게 둘 것 같아? 아빠 여기 있다, 마틴. 내가 널 붙잡고 있어.”
간병인이 저자가 의식이 돌아온 걸 발견하면서 이야기는 일대 전환을 맞는다. 컴퓨터를 활용해 의사를 주고받을 수 있게 되고, 대학에도 진학하게 된다. 인생의 반려자를 만나 사랑도 키워나간다. 소설가 백영옥은 ‘추천의 말’을 통해 이 책을 ‘상처가 꽃이 되는 순서에 관한 이야기’라고 소개했다.
박지훈 기자 lucidfall@kmib.co.kr
[책과 길] 13년 동안 식물인간으로 산 남아공 남성 이야기
입력 2017-03-24 05: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