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길] 무질서한 정보 선별하는 똑똑한 뇌

입력 2017-03-24 05:05
왼쪽에 있는 사진①만 제시하면 대다수 사람들은 뚫어져라 쳐다봐도 문양의 정체를 확인하기 힘들다. 사진②를 ‘참고 자료’로 내놓아야 이 사진에 담긴 것이 무엇인지 판별 가능하다. 우리 뇌에 어떤 특징이 있기에 이런 현상이 나타나는 걸까. 신간 ‘뇌 속에 또 다른 뇌가 있다’는 이처럼 매혹적인 뇌과학의 세계를 전하는 특별한 과학책이다. arte 제공
여기, 사진 두 장이 있다. 먼저 사진①을 자세히 들여다보자. 흑백으로 처리된 추상적인 문양이어서 어떤 사진인지 알아채기 힘들다. 하지만 사진②로 시선을 옮기면 사진의 정체를 확인하게 된다. 같은 사진에 파란색 선만 그었을 뿐인데, 문양의 정체가 소의 머리라는 걸 파악할 수 있다.

여기까지 이해됐다면 사진①을 다시 보자. 방금 전까지 보이지 않던 소 한 마리가 도드라질 것이다. 선이 사라졌는데 소의 형태가 포착된다. 왜 이런 현상이 벌어지는 걸까.

이유는 인간의 뇌라는 게 그렇게 설계됐기 때문이다. 뇌는 ‘이것은 무엇이다’라고 인지하게 되면, 이후부터는 사진에 배열된 무질서한 정보 가운데 중요하다고 판단되는 사실만 선별해 해석한다.

독일에서 활동하는 뇌과학자 장동선(37)이 펴낸 ‘뇌 속에 또 다른 뇌가 있다’에는 이처럼 우리들 머릿속의 기묘한 메커니즘을 확인할 수 있는 내용이 가득 담겨 있다. 과학책이지만 어려운 과학용어는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과학자나 심리학자들이 벌인 흥미로운 실험들을 그러모은 뒤 저자 자신의 경험담, 참고 사진과 그림을 차곡차곡 포개 뇌과학의 본질에 가닿는 길을 안내한다.

책은 뇌의 성장 과정을 따라가면서 뇌의 특징을 소개하는 얼개를 띠고 있다. 엄마 뱃속에서 처음 나왔을 때, 인간의 눈에 비친 세상은 혼돈 그 자체였다. 발 디딜 틈 없이 잡동사니로 가득 차 있는 방을 떠올리면 쉬울 듯하다. 인간은 신생아 때부터 ‘뇌’라는 방을 정리하기 시작한다. 잡동사니를 하나씩 분류해 방 곳곳에 있는 서랍에 넣는다. 이런 과정을 통해 색깔을, 형체를, 나와 당신의 차이를 알아나간다. 방이 정리되면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보이고, 필요한 것을 곧바로 찾을 수 있다.

귀가 솔깃해지는 얘깃거리가 간단없이 등장한다. 왜 유럽인은 아시아인의 외모가 비슷하다고 여길까, 자기 몸을 스스로 간질여도 간지럽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돈과 권력은 우리네 의식을 어떻게 뒤흔들까…. 이야기는 중구난방 뻗어나가지만 여러 챕터에서 번번이 도달하는 결론은 인간의 뇌가 ‘사회적 뇌’로 진화됐다는 것이다. 우리의 뇌는 다른 사람과의 상호 작용을 통해 배우고 성장하며, 상대를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게 뇌의 일상이라는 주장이 거듭 등장한다.

‘우리의 뇌는 매 순간 세상을 경험하고 지각할 때 늘 예전의 경험을 바탕으로 세상을 지각합니다. ‘나’라는 존재는, 결코 단단한 돌로 된 조각상이 아닙니다. 자아는 오히려 반죽 덩어리로 만든 소조상과 비슷합니다. …우리 뇌를 가장 행복하게 만들어주는 것은 다른 사람들입니다. 우리의 뇌는 다른 사람과 소통하고 관계를 나누기 위해 진화했기 때문이죠. 따라서 우리는 모두 사회적인 뇌를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뇌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하나 있다면 그것은 바로 사람입니다.’

책은 지난해 독일에서 출간돼 베스트셀러 반열에 올랐다. 흥미로운 에피소드가 많은 데다 경어체로 쓰여서인지 책을 읽는 내내 유쾌한 과학 강연을 듣는 듯한 기분을 느낄 수 있다. 실제로 저자는 2014년 독일의 과학 강연 대회 ‘사이언스 슬램(Science Slam)’에서 우승을 거머쥐었다. 정재승 카이스트 교수는 저자에 대해 “대한민국에서 가장 매력적인 뇌과학자 중 하나로 성장할 것”이라고 했다.

박지훈 기자 lucidfall@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