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시각-고세욱] 스포츠맨십은 증오심을 이긴다

입력 2017-03-22 17:43 수정 2017-03-22 21:23

처음에는 방송사의 새로운 중계방식인 줄 알았다. 지난 19일 중국에서 끝난 올해 첫 한국여자프로골프(KLPGA) 투어 경기에서는 유독 한 선수가 나올 때마다 특이한 구도의 화면이 제공됐다. 다른 선수들이 티샷할 때는 TV에 정면으로 나왔는데 이 선수만 등장하면 옆모습만 잡혔다. 아이언샷을 날릴 때나 퍼팅을 할 때는 갑자기 먼 거리 화면으로 바뀌어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챔피언 퍼트를 성공시킬 때도 화면에 비친 것은 선수의 얼굴이 아닌 발이었다. 우승자 김해림이 후원사 롯데 로고가 박힌 모자를 썼고 영상 송출을 중국 CCTV가 담당했다는 사실을 알고서야 감이 왔다. 방송을 이용한 일종의 사드 보복이었다.

사드에 대한 중국의 감정적 대응은 널리 알려져 있다. 하지만 정치와 무관해야 할 스포츠에도 응징의 칼날을 휘두르는 것은 치졸하다. 전쟁이나 각종 제재, 이념 대립의 당사국들도 스포츠에서만은 갈등의 전선을 넓히지 않는 것이 국제관례다. 미국과 이란, 이스라엘과 중동국가 간 각종 경기에서도 주최 측과 선수들은 상대를 자극하는 행위를 삼간다. 불문율을 어길 경우 국제사회의 질타와 고립을 감수해야 한다. 더구나 이번 대회는 중국골프협회 측이 자국의 골프 저변 확대 등을 이유로 KLPGA에 요청해 이뤄졌다. 본인들이 펼친 판을 스스로 엎은 격이다.

골프에서 적나라하게 불거졌을 뿐 스포츠에서의 사드 파장은 현재진행형이다. 2018·2022년 동계올림픽 개최도시인 평창과 베이징 간 협력을 위해 22일 예정된 최문순 강원지사의 중국 방문이 중국 측 요청으로 연기됐다. 지난 11∼12일 강원도 정선에서 열린 2017 아시안컵 산악스키 대회에서도 당초 참가하기로 한 중국이 돌연 이를 번복했다.

이런 점에서 당장 23일 저녁 중국 창사에서 치러지는 월드컵 한·중 예선전을 걱정하는 사람이 많다. 축구는 집단주의 정서를 자극하는 대표적인 종목이다. 가뜩이나 축구 공한증(恐韓症)으로 열등감에 빠진 중국 팬들이 사드로 촉발된 국수주의적 감정을 내비칠 경우 불상사가 우려된다. 선수들로서는 경기외적으로 고민거리가 하나 늘었다. 그렇다고 답이 없는 것은 아니다.

2014년 4월 28일 스페인 프로축구 FC바르셀로나가 비야레알 원정경기를 가졌다. 당시 홈팬이 바르셀로나 수비수 다니엘 알베스(브라질)에게 바나나를 던졌다. 유색인을 원숭이 취급하는 인종차별 행위였다. 하지만 알베스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바나나를 한 입 베어 문 뒤 코너킥을 찼다. 인터뷰에서 그는 “바나나를 던진 이에게 감사하다. 골로 연결되는 두 번의 크로스를 올릴 수 있도록 에너지를 줬다”고 쿨하게 말했다. 이후 SNS에서는 ‘인종차별 반대, 우리는 모두 원숭이다(Say No to Racism, We Are All Monkeys)’ 캠페인이 벌어졌다. 그라운드에서 인종차별 행위를 줄이는 효과를 거뒀다.

스포츠에서 증오에 대한 해법은 바로 평정심과 페어플레이, 즉 스포츠맨십이다. 굴욕을 당한 김해림은 시상식에서 어떤 불만도 내색하지 않고 이렇게 말했다. “정치는 모르지만, 한국과 중국이 다시 활발하게 교류하면 좋겠습니다.” 성숙한 수상소감에 박수가 나왔다. 이제 축구 대표팀 차례다. 23일 경기에서는 쓰러진 상대선수에게 먼저 손을 내밀어 주자. 요란한 골 세리머니 대신 중국팬에게 하트 손모양을 보여주면 어떨까. 스포츠맨십은 적대적 상대를 부끄럽게 만든다. 경기 후 ‘우리는 모두 태극전사다’라는 말을 듣는다면 결과와 관계없이 승자는 우리다. 치열한 승부와 아름다운 내용이 가득할 대표팀 경기를 기대한다.

고세욱 스포츠레저부장 swkoh@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