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물섬에 봄마중 나온 수줍은 안산 풍도

입력 2017-03-23 00:00
‘급하기도 하셔라/누가 그리 재촉했나요/반겨줄 임도 없고/차가운 눈, 비, 바람, 저리 거세거늘/행여/그 고운 자태 상하시면 어쩌시려고요/살가운 봄바람은, 아직/저만큼 비켜서서 눈치만 보고 있는데/어쩌자고 이리 불쑥 오셨는지요/언 땅 녹여 오시느라/손 시리지 않으셨나요/잔설 밟고 오시느라/발 시리지 않으셨나요’

이승철의 시 ‘변산바람꽃’이다. 생김새가 거의 같아 이 꽃으로 분류됐다가 최근 다른 점이 발견돼 섬 이름을 딴 꽃이 있다. ‘풍도바람꽃’이다.

풍도는 넓이 1.84㎢, 해안선 길이 5㎞인 작은 섬이다. 이름만 들으면 바람섬(風島)을 떠올리기 쉽지만, 예부터 단풍나무가 많아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풍도(楓島)라 불렸다. 청일전쟁 때 이곳 앞바다에서 청나라 함대를 기습해 승리한 일본이 섬 이름을 풍도(豊島)로 적고, 그 뒤 우리 문헌에도 그대로 표기돼 굳어졌다.

이름으로만 보면 풍도에 수산자원이 풍부할 것 같지만 정작 풍요로움과는 거리가 멀다. 섬 주변에 갯벌이 없어서다. 주민들은 해마다 겨울 몇 달 동안 인근 섬으로 이주해 수산물을 채취하며 생활해야 했다. 하지만 뜻밖의 장소에서 풍요로움이 발견됐다. 후망산(해발 175m) 일대를 화려하게 수놓는 야생화가 그것이다.

풍도 야생화는 자생지가 넓고 개체수가 많다. 게다가 풍도에서만 볼 수 있는 식물이 2종이나 된다. 풍도바람꽃과 풍도대극이다. 이 봄꽃을 보려고 3월이면 수많은 사진작가와 나들이객들이 풍도로 몰려든다.

풍도에는 마을이 선착장을 중심으로 옹기종기 모여 있다. 마을길로 접어들면 담벼락에 물고기, 문어, 조개 등이 그려져 있다. 그 안에 손바닥만한 건물과 운동장이 보인다. 여기가 1933년에 문을 연 대남초등학교 풍도분교장이다.

본격적인 야생화 트레킹은 골목길을 휘돌아 산비탈을 오르면 만나는 ‘인조의 은행나무’에서 산길로 접어들면서 시작된다. 보물찾기를 하듯 후망산 야생화 군락지를 감상하고, 군부대를 지나 풍도대극 군락지와 바위가 아름다운 북배를 거쳐 해안을 따라 선착장으로 돌아오는 길이 좋다. 2시간 30분쯤 걸리지만 꽃사진을 찍으려면 시간을 충분히 잡아야 한다.

은행나무 앞에서 보면 붉게 또는 푸르게 원색이 칠해진 지붕이 옥빛 바다와 어우러져 한 폭의 수채화를 펼쳐놓는다. 이 은행나무는 이괄의 난을 피해 풍도로 피난 온 인조가 섬에 머문 기념으로 심은 것이라고 전해진다. 마을 사람들은 이 나무를 어수거목(御手巨木)이라고 부르며 풍도의 수호신으로 삼았다. 나무 아래 은행나무샘이 있지만 물줄기가 말라 있다.

후망산에서 가장 먼저 만난 꽃은 복과 장수를 기원하는 복수(福壽)초다. 꽃이 크고 황금색으로 빛난다. 꽃 아래에 복슬복슬 자라난 진초록 잎과 가지가 노란 꽃과 잘 어울린다. 복수초 다음은 노루귀다. 분홍색 노루귀와 흰색 노루귀가 번갈아 나타나며 꽃대의 보송보송한 솜털을 자랑한다. 하늘거리는 모습이 마음마저 간질인다. 바닥에 납작 엎드려 핀 작은 야생화 한송이가 긴 겨울을 지나 결국 봄이 왔음을 알려준다. 사람들이 무릎을 꿇거나 엎드려 있다. 꽃 사진을 찍는 모습이 경이로운 존재를 알현하는 자세처럼 보인다.

철조망이 보이기 시작하면 하얀 풍도바람꽃이 봄처녀처럼, 부잣집 아씨처럼 여리고 고운 모습을 수줍게 내보인다. 풍도바람꽃에서 우리 눈에 흰색 꽃잎처럼 보이는 것은 꽃받침잎이다. 진짜 꽃잎은 꽃 안쪽에 수술과 함께 둥근 깔때기 모양으로 돼 있는 것이다. 초록색 또는 노란색을 띤다.

이 ‘풍도아씨’는 예전에는 변산바람꽃으로 알려졌지만 식물학자 오병윤 교수가 다소 다른 부분을 발견했다. 꽃이 변산바람꽃보다 크다. 결정적으로 밀선(蜜腺·꿀샘) 크기에 차이가 있다. 변산바람꽃은 생존을 위한 진화로 꽃잎이 퇴화해 밀선이 2개로 갈라졌다. 반면 풍도바람꽃은 밀선이 변산바람꽃보다 넓은 깔때기 모양이다. 2009년 변산바람꽃의 신종으로 학계에 알려졌고, 2011년 1월 국가표준식물목록위원회에서 풍도바람꽃으로 정식 명명돼 풍도 고유종이 됐다.

좀 더 오르면 널찍한 공터가 나온다. 곳곳이 바람꽃과 복수초 군락지다. 자세히 보면 길쭉한 타원형의 흰색 꽃잎을 살짝 오므린 꿩의바람꽃이 수줍은 색시처럼 다소곳하다. 여기서 정상처럼 보이는 언덕에 올라 산등성이를 타면 군부대를 만난다. 이 길에 풍도대극이 많다.

풍도대극은 이른 봄 붉은 보라색으로 올라와 연녹색의 청순한 잎으로 자란다. 창칼 같은 잎새가 꽃잎을 삥 둘러 있어 큰 대(大), 창 극(戟)을 쓴다. 붉은대극과 같은 속(屬)에 속하며 생김새도 비슷하다. 붉은대극이 총포(꽃대 끝에서 꽃 밑동을 싸고 있는 비늘 모양의 조각)에 털이 많다. 외형상 차이는 미비하지만, 동위효소분석에 따라 붉은대극과 분명히 구분되는 명확한 특징을 가지고 있는 풍도대극은 국가표준식물목록에 정식 명칭으로 등록돼 있다.

군부대 뒤쪽 산비탈로 내려서면 북배에 닿는다. 북배는 풍도 서쪽 해안을 이루는, 잘 알려지지 않은 비경이다. 붉은 바위를 뜻하는 ‘붉바위’에서 유래한 이름으로 보인다. 북배의 붉은 바위는 그 색감이 오묘하며 파란 바다와 어울려 절경을 이룬다. 바위 너머로 ‘북배딴목’이 보인다. 밀물 때는 풍도 안의 또 다른 섬, 썰물 때는 바닷길이 열려 풍도와 연결되는 ‘모세의 기적’을 연출한다. ‘딴’은 외딴, ‘목’은 목처럼 가늘게 이어져 있다는 뜻이다. 인근에는 흉하게 파헤쳐 놓은 채석장이 풍도의 아픔을 전해준다. 풍도는 야생의 매력을 풍성하게 품고 있는 보석 같은 섬이다.

■여행메모
안산에 속하지만 당진이 더 가까워… 1일 1회 배 운항, 승선권 등 예비해야

충남 당진·서산 앞 바다에 떠 있는 풍도는 행정구역 상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에 속해 있다. 인천항에서 서남쪽으로 43㎞, 대부도에서 24㎞, 당진 석문에서 12㎞ 떨어져 있다. 120여명의 주민들이 살고 있다. 풍도 동쪽 6㎞에는 말육도·종육도·중육도·미육도 등이 나란히 늘어서 있고, 남쪽으로는 충남 당진군 대난지도와 서쪽으로는 울도·승봉도 등과 마주하고 있다.

인천에서 안산 대부도를 거쳐 풍도까지 하루 한번 정기여객선이 왕복 운항한다. 인천항 연안여객터미널에서 오전 9시30분 서해누리호가 출발해 10시30분에 대부도 방아머리선착장을 거쳐 풍도로 들어간다. 인천항에서 2시간30분, 방아머리에서 1시간30분 남짓 걸린다. 요금은 대인 기준 1만3600원. 경기도 화성 전곡항, 서산의 삼길포항·비금도항 등에서 낚싯배를 타고 다녀오기도 한다.

'가보고 싶은 섬' 사이트(island.haewoon.co.kr)에서 미리 예매를 하거나 현장 예매를 할 수 있다. 승선인원이 97명밖에 되지 않아 표를 구하기가 여간해선 쉽지 않다. 성수기에는 1인당 5000원의 입도 비용을 받는다.

현금과 먹을 것을 준비해 가는 것이 좋다. 풍도바위펜션(032-834-1330), 풍도민박(032-831-7637), 풍도랜드(032-831-0596), 기동이네민박(032-833-1208), 하나민박(032-831-7634), 바다민박(032-832-3720), 풍도횟집민박(032-843-2628), 풍어민박(032-831-3727) 등에서 숙박해도 된다. 민박은 2인 기준 5만원.

트레킹은 후망산 야생화 군락지와 서쪽 북배를 연결하면 된다. 선착장→풍도분교→풍도마을→은행나무→군부대→북배→풍도등대→선착장 코스로, 5.1㎞에 2시간30분쯤 걸린다. 꽃사진을 찍으려면 시간을 충분히 잡아야 한다.

풍도(안산)=글·사진 남호철 여행선임기자 hcnam@kmib.co.kr, 그래픽=안지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