朴 “국민께 송구, 성실히 조사 임하겠다” 단 두 마디 메시지

입력 2017-03-21 17:53 수정 2017-03-21 21:06
헌정 사상 처음으로 파면된 박근혜 전 대통령이 21일 서울 서초동 서울중앙지방검찰청에 피의자 신분으로 들어서고 있다. 차에서 내린 박 전 대통령은 잠시 미소를 짓기도 했지만 중앙현관 앞에 대기하던 취재진 앞에서 주변을 둘러보며 시시각각 표정이 바뀌었다. 윤성호 기자

박근혜 전 대통령이 탑승한 에쿠스 차량은 21일 오전 9시24분 서울중앙지검 청사 앞에 섰다. 경호원 7명이 근접경호를 위해 차량을 둘러싼 뒤에야 차문이 열렸다. 임원주 서울중앙지검 사무국장이 차에서 내린 박 전 대통령을 맞았다. 임 사무국장에게 가벼운 목례로 인사하며 박 전 대통령은 옅은 미소를 지었다. 이날 검찰청사에 들어서면서 보인 유일한 미소였다.

박 전 대통령은 시종일관 착잡한 표정이었다. 헌정사상 최초로 대통령직에서 파면된 지 11일 만에 검찰에 소환된 심정이 표정에 고스란히 드러났다. 1기 특별수사본부와 박영수 특별검사팀의 대면조사를 모두 거부했지만, 결국 검찰에 소환된 처지에서 비롯되는 초조함도 엿보였다. 피곤한 듯 얼굴과 눈꺼풀은 살짝 부어 있었다. 특유의 올림머리를 했지만 앞 머리카락이 살짝 이마를 가렸다. 남색 코트에 바지정장 차림이었고, 중간 굽 정도의 검은색 구두를 신었다.

중앙현관을 향해 걷던 박 전 대통령은 임 사무국장에게 포토라인의 위치를 물었다. 임 사무국장의 안내에 따라 중앙현관 앞 계단 아래 설치된 삼각형 포토라인 주변에 25걸음 만에 섰다. 서울 삼성동 사저로 돌아간 직후 발을 접질렸다는 얘기가 측근을 통해 흘러나오기도 했지만 불편해 보이는 걸음걸이는 아니었다. 양손은 깍지를 껴 몸 앞으로 모은 채 카메라 플래시 세례를 받았다.

박 전 대통령이 선 자리를 중심으로 좌우 7m 간격으로 둘러쳐진 취재라인 뒤로는 100여명의 취재진이 한 시간 전부터 빼곡히 서 있었다. 전직 대통령에 대한 경호상 이유로 이틀 전 허가를 받은 기자들에게만 근접취재가 허용됐다. 취재진의 이목은 멈춰선 박 전 대통령의 입을 향했다. 검찰청사 앞에서 미리 준비된 입장을 발표하리란 예고가 나왔던 터였다. 취재진은 3초가량 박 전 대통령이 입장을 밝히길 기다렸다.

하지만 박 전 대통령이 먼저 던진 대국민 메시지는 없었다. 오른편에 있던 임 사무국장이 “말씀 안 하시겠습니까”라고 묻자 취재용 마이크가 설치된 왼편의 취재진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취재진의 질문이 먼저 나오길 기다리는 눈치였다. “검찰의 수사가 불공정했다고 생각하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박 전 대통령은 “국민 여러분들께 송구스럽게 생각한다”고 대답했다. 질문을 던진 기자 쪽으로 살짝 몸을 돌린 채 고개를 가볍게 끄덕이며 대답했다. 연습한 듯 차분한 목소리는 박 전 대통령 차량을 따라 온 취재헬기 소리에 묻혀 잘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았다. 잠시 아래를 바라보며 뜸을 들이더니 “성실하게 조사에 임하겠다”는 말을 덧붙였다.

단 두 마디를 남긴 박 전 대통령은 취재진의 다음 질문을 기다리지 않고 몸을 돌려 중앙현관으로 이어진 계단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계단을 오르는 도중 “아직도 이 자리에 설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이 나왔지만 걸음을 멈추지도, 취재진에 눈길을 주지도 않았다.

박 전 대통령은 곧장 서울중앙지검 중앙현관을 통과했다. 전직 대통령의 검찰조사라는 대한민국 헌정사의 비극이 반복되는 순간이었다. 평소 이용하지 않는 중앙현관은 박 전 대통령이 사저를 출발한 직후인 9시17분부터 개방돼 있었다. 통상 서울중앙지검 출입통로로 이용되는 왼쪽 끝 현관은 박 전 대통령의 동선이 길어진다는 이유로 이날은 쓰이지 않았다. 박 전 대통령은 검찰 간부나 귀빈들이 타는 금색 엘리베이터 대신 일반 은색 엘리베이터를 타고 조사실로 향했다. “특혜조사 시비가 없도록 하라”는 김수남 검찰총장의 사전지시에 따른 것이다.

정현수 황인호 기자 jukebox@kmib.co.kr, 사진=윤성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