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년 5월 영국 총선에서 18년 장기집권 보수당을 누르고 압승을 이끈 노동당 토니 블레어 총리는 좌파 진영으로부터 ‘토리(Tori·보수당) 블레어’ ‘바지 입은 대처’라는 비난을 들었다. 노동당 본연의 정책보다 ‘철의 여인’ 마거릿 대처 보수당 정권이 취해 온 신자유주의 정책의 골간을 수용해서다. 블레어는 사회학자 앤서니 기든스가 주창한 사회민주주의와 신자유주의를 조화시킨 중도 이념의 ‘제3의 길’을 내세웠다. 노동당의 핵심인 국유화 강령을 폐기하고 일하는 복지, 시장경제, 노동시장 유연화 정책 등을 추진했다.
민주주의의 요체는 다양성이다.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느리더라도 최상의 합을 찾아가는 과정이 민주주의다. 언젠가부터 그런 소중한 가치가 발전을 가로막고 있으니 아이러니다. 분열과 갈등은 우리 사회를 특징짓는 단어가 돼버렸다. 촛불 아니면 태극기, 진보 아니면 보수, 이분법적으로 갈라져서는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한다. 외환위기 이후 진보 정권 10년과 보수 정권 9년이 이를 방증한다.
수출과 제조업 중심의 성장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의료·교육·금융·법률 등 서비스산업을 신성장동력 산업으로 키우자고 한 게 노무현정부 때다. 하지만 기득권 세력의 반발과 야당의 반대에 부닥쳐 십수년째 제자리걸음이다. 노동개혁은 좌우 진영 싸움에 좌초됐다. 한옥 호텔 하나를 짓지 못하고 지리산에 케이블카도 설치 못하는 동안 우리는 중진국 함정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저성장 터널에 갇혀버렸다. 국제통화기금(IMF)은 올해와 내년 우리나라 경제성장률을 각각 2.6%와 2.8%로 전망하면서 경제활동이 잠재력에 훨씬 못 미치고 있다고 지적했다. 4년 연속 2%대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을 추진한 것도 보수 정권이 아닌 노무현정부다. 영화인들은 시장을 개방하면 국산 영화가 망한다며 삭발하고 거리로 나섰지만 오히려 국산 영화의 자생력은 높아졌다.
국론분열과 사회갈등은 성장을 가로막는다. 헌법재판소의 탄핵 결정도 승복할 수 없다는 박근혜 전 대통령이나 그의 삼성동 집 앞에서 통곡하는 사람들에 기대 정치 부활을 모색하는 일부 친박계까지 껴안고 갈 수는 없다. 하지만 건강한 보수는 품어야 한다. 87년 직선제 도입 이후 6명의 대통령 모두 지지하지 않은 나머지 반쪽과 지난한 싸움을 했다.
박근혜 탄핵을 이끌어낸 촛불혁명은 적폐(積弊)를 청산하고 새로운 시대를 열 것을 주문하고 있다. 과거 정책 뒤집기와 ‘복수혈전’으로 5년을 또 허비하기에는 우리가 처한 상황이 엄중하다. 양극화와 성장동력 부재, 인구재앙, 4차 산업혁명으로 인한 일자리 소멸 등 난제들이 쌓여 있다. 위기를 느끼지 못하는 ‘끓는 물속 개구리’가 돼 일본의 잃어버린 20년을 따라갈 것인가, 아니면 한 단계 도약할 것인가 하는 역사적 변곡점에 서 있다. 다음 정권은 좌우에 치우치지 않은 통합과 화합의 대통령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이유다. 누가 당선되더라도 여소야대 정국에서 대연정을 하지 않으면 사사건건 발목 잡혀 임기 내내 아무것도 바꾸지 못할 수도 있다. 국정을 농단한 무능한 대통령을 몰아내는 일도 온건보수와 진보가 손잡지 않았더라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노사모 핵심활동을 하며 반대 진영을 향해 독설을 쏟아냈던 배우 명계남씨는 얼마 전 언론 인터뷰에서 “과거 날 서고 정제되지 않은 단어를 써가면서 제가 원하지 않는 세력을 향해 분노를 표현해 온 것이 얼마나 편협했는지 부끄럽기 한이 없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는 “노무현 전 대통령이 다시 정치를 시작한다면 안희정 후보처럼 할 것 같다”고 했다. 공감한다.
이명희 논설위원 mheel@kmib.co.kr
[여의춘추-이명희] 바지 입은 대처가 필요하다
입력 2017-03-16 18: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