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이만수 <14> 성적 부진 스트레스… 매일 새벽 눈물로 기도

입력 2017-03-16 00:00
이만수 감독(왼쪽)이 2013년 7월 SK 와이번스 감독 시절 홈런을 치고 들어온 최정 선수를 격려하고 있다.

2013년 10월말 아내와 아들, 며느리와 함께 인천 문학야구장에 들어서는데 SK 와이번스 팬들이 온갖 욕을 늘어놨다. 고등학생으로 보이는 여학생 두 명이 소리쳤다. “야 임마, 니가 감독이냐.” 며느리는 어쩔 줄 몰라 하더니 결국 눈물을 터뜨렸다. 그렇게 욕을 왕창 얻어먹던 시절 라오스에 야구를 전수해 달라는 현지 사업가의 부탁이 있었지만 나중에 해주겠다고 약속만 했다. 성적부진에 따른 극심한 스트레스로 잠을 못 이뤘다. 매일 새벽 눈물의 기도를 드렸다. 그러나 팀 성적은 좀처럼 나아지질 않았다. 2014년에는 정규시즌 5등을 했다. 평생 들을 만한 욕을 감독으로 재직하던 3년간 몽땅 얻어먹은 것 같았다.

구단주의 점심식사 호출이 왔다. “저희는 김용희 감독 체제로 가기로 했습니다. 감독생활이 끝나면 무엇을 하실 것입니까.” 보통 일방적으로 통보하는데, 구단주는 최대한 예의를 갖췄다.

“예, 야구를 통해 할 수 있는 것은 22가지나 있습니다. 야구해설 재능기부 야구아카데미 뿐만 아니라 라오스에 야구협회를 만들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많은 일을 하려면 야구 재단이 필요합니다. 재단 설립을 좀 도와 주셨으면 합니다.” “나중에 재단이 정상궤도에 오르면 도와드리겠습니다.”

감독직을 사임하고 경기도 광주 광림수도원으로 향했다. 아내에게 줄 깜짝 선물로 동유럽 여행권도 준비했다. “이신화씨, 그동안 내 때문에 고생 많았제. 이제 고마 내랑 동유럽 가자.” “여보, 동유럽은 언제든 갈 수 있어요. 하지만 재능기부는 한번 약속을 못 지키면 끝까지 못해요. 전에 약속한 게 있잖아요. 라오스로 가세요.” “아이고, 알았다. 마.”

2014년 11월 12일. 감독 은퇴 후 1주일 만에 떠밀리다시피 라오스로 향했다. 사실 나는 라오스가 어디에 붙어있는 나라인지도 몰랐다. 현지에 도착해서 북한과 같은 사회주의 국가라는 걸 알고 놀랐고, 야구팀이 하나도 없다는 데 한번 더 놀랐다. 운동장이라고 해봐야 잡초가 듬성듬성 있고 여기저기 움푹 파인 공터일 뿐이었다. 모래바람까지 부니 황량한 광야 같았다. 하지만 아이들의 눈은 맑았다. 야구를 전해주러 온 한국 손님을 맞기 위해 아이들이 우르르 몰려나왔다. 아마 그때의 심정은 1904년 필립 질레트 선교사가 조선 땅에 야구를 처음 소개할 때의 마음과 비슷했을 것이다. ‘그래, 사회주의 국가에서 스포츠로 아이들의 마음을 열고 이들과 땀을 같이 흘리면 생명의 복음은 자연스럽게 흘러갈 것이다.’

현지 사업가가 야구선수 지망생을 불러 모았다. 처음엔 20명도 안 됐지만 동네를 다니며 홍보하자 45명이 왔다. 대부분 너덜너덜해진 슬리퍼 차림이었다. 그것도 없는 아이들은 맨발이거나 타이어 고무 같은 것으로 얼키설키 만든 걸 신고 있었다.

노트북으로 한국과 일본, 미국 야구를 보여줬다. 다들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래, 자슥들아. 이게 야구라고 하는 기라. 느그들 이런 야구 하고 싶제.” “네!” 목소리만큼은 우렁찼다. 한국 프로야구단에서 쓰다 남은 배트와 야구공, 얼룩진 트레이닝복을 나눠줬다. 아이들과 땀 흘리며 뒹굴다보니 금세 친해졌다. 산들바람이 부니 기분이 상쾌해졌다. 하나님의 미세한 음성이 들렸다.

“만수야, 내가 너를 최고의 자리까지 인도하고 많은 인기를 누리게 했던 것은 이때를 위함이었단다.” 눈물이 핑 돌았다. ‘그래, 이 자리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전적인 선택에 있었다. 내 노력, 내 열심이 아니었다. 결국은 하나님이 예비하신 거구나.’

정리=백상현 기자 100sh@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