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간도 기독교’를 찾아서] (下) 기독교적 문화가 일상에 가득했다

입력 2017-03-15 00:00
1945년 3월 6일 북간도 룽징에서 기독교식으로 치러진 윤동주 시인 장례식. 영정을 기준으로 상복을 입지 않은 왼쪽의 교회 성도들이 눈길을 끈다. 규암김약연기념사업회 제공
1939년 11월 고 문익환 목사의 아버지 문재린 목사가 주례한 결혼식의 기독교식 '결혼증빙서'. 문서 가장자리가 성경 구절로 가득 차 있다. 규암김약연기념사업회 제공
1929년 명동기독여자청년회 주최로 북간도 명동촌 명동교회 뒤뜰에서 열린 그네타기 대회 장면. 규암김약연기념사업회 제공
‘사나희는 부인을 사랑하야 괴롭게 말지니라’.

골로새서 3장 19절 ‘남편들아 아내를 사랑하며 괴롭게 말지니라’는 성경구절이 70년 전 표기법에 따라 문서 오른쪽 가장자리에 정갈한 글씨체로 쓰여 있다. 왼쪽에는 잠언 12장 4절의 ‘어진 부인은 사나희의 관면과 갓흐니라’(어진 여인은 그 지아비의 면류관이라) 구절이 눈길을 끈다.

㈔규암김약연기념사업회가 최근 공개한 일제 강점기 북간도의 일상을 담은 사진들 속에는 곳곳에 기독교적 색채가 배어있었다. 1899년 초 이곳으로 집단 이주하기 시작한 김약연 문치정 정재면 구춘선 윤하현 등 5대 가문이 기독교신앙공동체로 탈바꿈하면서 당시 문화까지 바꿔놓은 것이다.

‘결혼증빙’ 문서가 대표적이다. 요즘의 ‘결혼증명서’ ‘성혼선언서’와 같은 성격으로 결혼식에서 성혼선언을 하고 이를 증명하는 문서다.

‘오늘 두 사람은 하나님의 명령과 그 세우신 예법대로 증인 앞에서 확실한 증거를 지어 결혼식을 행한 바….’ 1939년 11월 7일자로 작성된 문서에는 결혼을 증명하는 문구와 함께 부부 간의 사랑과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강조한 성경 구절이 눈에 띈다. 요즘엔 흔하지 않은 ‘증참’(증인)란도 이색적이다.

대한민국역사박물관 김시덕 교육과장은 14일 “1934년에 일제 조선총독부가 관혼상제 예법을 개선한다는 명목으로 별도의 의례준칙을 새로 발표했다”면서 “하지만 5년 정도 지난 시점인데도 북간도에서는 기독교 혼례 의식이 남아 있었음을 보여주는 문서”라고 설명했다.

장례식도 마찬가지다. 1945년 3월 6일 북간도 룽징(龍井) 윤동주 시인의 고향집에서 치러진 윤 시인의 장례식. 영정 사진을 중심으로 왼쪽의 용정중앙교회 성도들과 장례예식을 집전한 문재린 목사는 상복을 입지 않았다. 반면 오른쪽에 서 있는 유족들 중에는 삼베 두건을 착용한 모습이 보여 대조적이다.

3년 앞선 1942년 10월 29일에 치러진 규암 김약연 선생의 장례식 사진에는 죽은 사람의 성씨나 관직 등을 적은 깃발인 ‘명정(銘旌)’에 한자로 ‘김약연 목사’라는 글자가 선명하다. 유교식 전통대로라면 ‘김공지구(金公之柩)’라는 문구가 들어가야 했다.

병풍에는 ‘성경’ ‘찬송’ ‘기도’ ‘성경봉독’ ‘설교’ 등 장례식순이 소개돼 있고, 장례예배가 드려질 수 있도록 한편에 집례 목사를 위한 단상도 마련됐다. 일부 사진들에는 상주·참석자들이 착용한 검은색 상복과 함께 이들의 왼쪽 가슴에 달린 근조 리본이 눈에 띈다.

김 교육과장은 “당시 북간도의 관혼상제 의례에 기독교 문화와 전통문화, 서구 문화가 서로 융화돼 있었음을 보여준다”고 말했다.

북간도 현지 기독단체들의 문화생활도 엿볼 수 있다. 1929년 명동기독여자청년회는 창립 9주년을 맞아 추천(그네타기)대회를 개최했다. 명동교회 뒤에 있는 나무에 매단 그네를 탄 여학생과 그 모습을 바라보는 동료들, 시상품인 듯한 각각 다른 크기의 무쇠솥 5개까지 모두가 이채롭다. 기념사업회 김재홍 사무총장은 “당시 북간도 기독교의 구석구석을 들여다 볼 수 있는 소중한 자료들”이라고 말했다.

박재찬 기자 jeep@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