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축구의 고질병 중의 하나는 인종 차별이다. 이번엔 ‘손샤인’ 손흥민(25·토트넘 홋스퍼)이 당했다. 지난 13일(한국시간) 영국 런던 화이트하트레인에서 끝난 토트넘과 밀월 FC의 2016-2017 잉글랜드축구협회(FA)컵 8강전 홈경기. 일부 극성 밀월 팬들은 손흥민이 공을 잡을 때마다 “그는 DVD 3개를 5파운드에 판다” “그는 라브라도(개의 품종)를 잡아먹는다”고 외쳤다. 영국 내 아시아인들이 불법으로 복사된 DVD를 판매하고 모든 한국인들이 개고기를 먹는다는 편견에 사로잡혀 추태를 보인 것이다. 손흥민은 해트트릭으로 인종차별 구호를 잠재웠다. 인종차별이 사라지고 있는 시대이지만 가장 격렬한 집단주의 종목인 축구, 특히 최고 축구무대인 유럽에서는 아직도 일부 유색인종 선수들이 모욕을 감내하며 뛰고 있다. 그러나 이에 대한 단죄와 저항도 커지고 있다.
손흥민을 겨냥한 인종 차별 구호로 영국 축구계는 발칵 뒤집혔다. 마틴 글랜 FA 회장은 영국 언론 ‘스카이스포츠’와의 인터뷰에서 “축구는 인종 차별 행위를 엄격히 금지한다. 포용의 가치를 추구하는 잉글랜드 축구에서 이런 일이 벌어져 매우 실망스럽다”고 밝혔다.
토트넘 구단은 14일 “인종 차별 응원을 한 관중들을 끝까지 찾아내기 위해 모든 방법을 동원할 것”이라며 CCTV 영상을 당국에 제공하겠다고 발표했다.
유럽축구 무대에서 인종 차별 발언에 시달린 한국인은 손흥민만이 아니다. 이청용(29·크리스털 팰리스)은 볼턴 시절이었던 2013-2014 시즌 번리와의 챔피언십(2부 리그) 경기에서 인종 차별 발언을 들었다. 이청용을 향해 폭언을 퍼부은 훌리건은 벌금과 함께 3년간 영국 내 모든 경기장 출입 금지 처분을 받았다. 기성용(28·스완지시티)은 셀틱에서 뛰던 2010년 10월 세인트 존스톤 원정경기 때 상대 팬들로부터 아시아인을 조롱하는 원숭이 소리를 들어야 했다. 박지성(36·은퇴)도 퀸즈파크 레인저스 시절 에버튼의 한 팬에게 ‘칭크(Chink)’라는 말을 들었다. 칭크는 ‘찢어진 눈’이라는 뜻으로 서양인이 동양인을 비하할 때 사용하는 말이다. 이 팬은 결국 법정 구속됐다.
가장 유명한 경기장 인종 차별 사례는 2013년 1월 이탈리아에서 벌어진 ‘보아텡 사건’이다. 당시 AC 밀란에서 뛰던 가나 태생의 케빈 프린스 보아텡(30·라스팔마스)은 프로 파트리아와의 친선전에서 인종 차별적인 노래가 흘러나오자 볼을 집어 들고 관중석을 향해 차 버린 뒤 그라운드를 떠났다. 사태를 파악한 밀란 선수들은 보아텡의 행동을 지지하면서 모두 경기를 포기했다.
브라질 출신의 다니 아우베스(34·유벤투스)는 FC 바르셀로나 소속이던 2014년 4월 28일 비야레알과의 리그 원정경기에서 악성 팬이 코너 플래그 근처로 던진 바나나를 태연히 주워 먹어 치웠다. 바나나가 달콤하진 않았을 것이다. 인종차별적인 모독을 재치 있게 받아친 아우베스는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모든 선수들이 아우베스처럼 소극적인 저항을 한 것은 아니다. 1990년대 중반부터 세계 최고 수비수로 이름을 날린 프랑스 축구 스타 릴리앙 튀랑(45)은 아예 투사로 변신했다. 축구 선수들이 은퇴 후 통상 지도자나 축구 관련 일에 종사하는 것과 달리 그는 2008년 은퇴와 함께 인종 차별 반대 운동가로 나섰다. 그에게는 모든 사람들이 동등한 인간으로 대접받는 사회가 축구보다 더욱 중요하다고 보고 인종차별의 질긴 줄을 직접 끊고자 했던 것이다.
김태현 기자 taehyun@kmib.co.kr
‘인종차별 흑역사’… 역풍 맞는 유럽축구
입력 2017-03-15 05: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