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미 권한대행 “엊그제 참으로 고통스럽고 어려운 결정을 했다”

입력 2017-03-13 18:01 수정 2017-03-13 21:42
이정미 헌재소장 권한대행이 13일 퇴임식을 마치고 경호를 받으며 서울 종로구 헌법재판소를 나서고 있다.곽경근 선임기자

헌정 사상 처음으로 현직 대통령의 파면 주문을 직접 낭독한 이정미 헌법재판소장 권한대행이 13일 6년간의 헌법재판관 임기를 마치고 퇴임했다. 1987년 3월 대전지법 판사 임용 후 30년 만에 무거운 법복을 벗으면서, 이 대행은 “바로 엊그제 참으로 고통스럽고 어려운 결정을 했다”고 말했다. 그는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통치구조의 위기상황과 사회갈등은 민주주의와 법치주의, 인권 보장이라는 헌법의 가치를 공고화하는 과정에서 겪는 진통”이라고 말했다.

이 대행은 퇴임사에서 “법의 도리는 처음에는 고통이 따르지만 나중에는 오래도록 이롭다”는 뜻의 한비자 구절인 ‘법지위도전고이장리(法之爲道前苦而長利)’를 언급했다. 그는 “비록 오늘은 이 진통의 아픔이 클지라도, 우리는 헌법과 법치를 통해 더 성숙한 민주국가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고 소회를 밝혔다.

헌재가 지난 10일 박근혜 전 대통령의 중대한 법 위반을 밝혀 파면을 선고했지만, 박 전 대통령은 “진실은 반드시 밝혀질 것”이라며 끝내 승복을 거부했다. 박 전 대통령의 일부 지지자들은 이날도 헌재 청사 주변에서 이 대행을 성토했다.

이 대행은 “분열과 반목을 떨쳐내고 서로를 껴안고 화합하고 상생하길 간절히 바란다”고 덧붙였다. 이어 “지금까지 늘 함께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리고, 대한민국과 헌법재판소를 위해서 늘 기도하겠다”고 퇴임사를 마무리했다. ‘기도하겠다’는 마지막 퇴임사는 애초 초안에 없었고, 이 대행이 단상에 올라 즉흥적으로 말한 것이었다.

이 대행은 1962년 울산 변두리의 농촌 지역에서 초등학교 교사인 아버지와 농사일을 하시는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4남2녀 중 막내였고, 어린 시절부터 부모님을 도와 농사일을 거들었다. 이 대행은 가정형편 때문에 대학 진학을 포기할 뻔했지만 고려대가 4년간의 등록금을 면제해줘 법학 공부를 할 수 있었다. 민주화의 격변 속에서 사법시험에 합격했고, 24년간의 법관 생활과 3년간의 사법연수원 교수 생활을 거쳐 2011년 3월 역대 최연소(49세)로 헌법재판관에 임명됐다.

이 대행은 헌법재판관에 임명될 때 “재판관으로서 가장 필요한 덕목은 타인에 대한 따뜻한 배려와 단단한 균형감각”이라고 밝혔다. 좌로나 우로 치우치지 않을 것이며, 다수의 의견을 존중하면서도 소외된 소수자와 약자에 대한 배려를 잃지 않겠다는 마음가짐이었다. 자질의 부족함을 말하던 이 대행이지만 임명 이후 주요 결정마다 많은 역할을 했다. 2014년 헌재가 통합진보당 정당해산 사건을 심리할 때에는 주심을 맡았고, 박 전 대통령의 탄핵심판에서는 재판장이었다.

이 대행의 퇴임식은 국민의례와 퇴임사만으로 단 8분 만에 끝났다. 법조계 원로와 헌재 직원들의 인사말 영상 상영, 편지 낭독, 축하 공연 같은 것도 없었다. 중대사 결정 이후 호화로운 퇴임을 피하려던 이 대행의 뜻이었다. 헌재는 “본인이 간소한 퇴임식을 원했다. 부군도 참석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이 대행은 마지막 식사도 구내식당에서 했다.

퇴임식이 마무리된 뒤에도 헌재에는 이 대행의 공직생활을 기리는 꽃바구니가 계속 도착했다. 꽃바구니를 나르던 이는 “일반 시민들이 어서 가져다 드리라고 한 것”이라고 전했다. 헌재 청사 건너편 가로수 아래에도 시민들이 가져다 둔 꽃다발이 쌓였다. 여전히 헌재를 비난하는 박 전 대통령의 지지자들은 1인 시위를 계속했다. 기자가 사진을 찍자 “찍지 말라”며 화를 냈다. 글=이경원 정현수 기자 neosarim@kmib.co.kr, 사진=곽경근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