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정 사상 처음으로 현직 대통령의 파면 주문을 직접 낭독한 이정미 헌법재판소장 권한대행이 13일 6년간의 헌법재판관 임기를 마치고 퇴임했다. 1987년 3월 대전지법 판사 임용 후 30년 만에 무거운 법복을 벗으면서, 이 대행은 “바로 엊그제 참으로 고통스럽고 어려운 결정을 했다”고 말했다. 그는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통치구조의 위기상황과 사회갈등은 민주주의와 법치주의, 인권 보장이라는 헌법의 가치를 공고화하는 과정에서 겪는 진통”이라고 말했다.
이 대행은 퇴임사에서 “법의 도리는 처음에는 고통이 따르지만 나중에는 오래도록 이롭다”는 뜻의 한비자 구절인 ‘법지위도전고이장리(法之爲道前苦而長利)’를 언급했다. 그는 “비록 오늘은 이 진통의 아픔이 클지라도, 우리는 헌법과 법치를 통해 더 성숙한 민주국가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고 소회를 밝혔다.
헌재가 지난 10일 박근혜 전 대통령의 중대한 법 위반을 밝혀 파면을 선고했지만, 박 전 대통령은 “진실은 반드시 밝혀질 것”이라며 끝내 승복을 거부했다. 박 전 대통령의 일부 지지자들은 이날도 헌재 청사 주변에서 이 대행을 성토했다.
이 대행은 “분열과 반목을 떨쳐내고 서로를 껴안고 화합하고 상생하길 간절히 바란다”고 덧붙였다. 이어 “지금까지 늘 함께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리고, 대한민국과 헌법재판소를 위해서 늘 기도하겠다”고 퇴임사를 마무리했다. ‘기도하겠다’는 마지막 퇴임사는 애초 초안에 없었고, 이 대행이 단상에 올라 즉흥적으로 말한 것이었다.
이 대행은 1962년 울산 변두리의 농촌 지역에서 초등학교 교사인 아버지와 농사일을 하시는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4남2녀 중 막내였고, 어린 시절부터 부모님을 도와 농사일을 거들었다. 이 대행은 가정형편 때문에 대학 진학을 포기할 뻔했지만 고려대가 4년간의 등록금을 면제해줘 법학 공부를 할 수 있었다. 민주화의 격변 속에서 사법시험에 합격했고, 24년간의 법관 생활과 3년간의 사법연수원 교수 생활을 거쳐 2011년 3월 역대 최연소(49세)로 헌법재판관에 임명됐다.
이 대행은 헌법재판관에 임명될 때 “재판관으로서 가장 필요한 덕목은 타인에 대한 따뜻한 배려와 단단한 균형감각”이라고 밝혔다. 좌로나 우로 치우치지 않을 것이며, 다수의 의견을 존중하면서도 소외된 소수자와 약자에 대한 배려를 잃지 않겠다는 마음가짐이었다. 자질의 부족함을 말하던 이 대행이지만 임명 이후 주요 결정마다 많은 역할을 했다. 2014년 헌재가 통합진보당 정당해산 사건을 심리할 때에는 주심을 맡았고, 박 전 대통령의 탄핵심판에서는 재판장이었다.
이 대행의 퇴임식은 국민의례와 퇴임사만으로 단 8분 만에 끝났다. 법조계 원로와 헌재 직원들의 인사말 영상 상영, 편지 낭독, 축하 공연 같은 것도 없었다. 중대사 결정 이후 호화로운 퇴임을 피하려던 이 대행의 뜻이었다. 헌재는 “본인이 간소한 퇴임식을 원했다. 부군도 참석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이 대행은 마지막 식사도 구내식당에서 했다.
퇴임식이 마무리된 뒤에도 헌재에는 이 대행의 공직생활을 기리는 꽃바구니가 계속 도착했다. 꽃바구니를 나르던 이는 “일반 시민들이 어서 가져다 드리라고 한 것”이라고 전했다. 헌재 청사 건너편 가로수 아래에도 시민들이 가져다 둔 꽃다발이 쌓였다. 여전히 헌재를 비난하는 박 전 대통령의 지지자들은 1인 시위를 계속했다. 기자가 사진을 찍자 “찍지 말라”며 화를 냈다. 글=이경원 정현수 기자 neosarim@kmib.co.kr, 사진=곽경근 선임기자
이정미 권한대행 “엊그제 참으로 고통스럽고 어려운 결정을 했다”
입력 2017-03-13 18:01 수정 2017-03-13 21: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