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개헌은 시대적 소명이다

입력 2017-03-13 17:31
헌법재판소가 파면한 것은 박근혜 전 대통령 개인만이 아니었다. 헌재는 탄핵 결정문을 통해 5년 단임 대통령제의 민낯을 그대로 보여줬다. 대통령의 권한 남용, 재벌기업과의 정경유착, 법치주의 무시 등이 그것이다. 무소불위의 권력은 재임기간 내내 경제, 체육, 교육, 문화 등 모든 영역을 유린했다. 그럼에도 국회 등 헌법기관의 견제나 언론 감시 장치는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 안창호 재판관의 지적은 더욱 구체적이다. 보충의견에서 현 대통령제를 제왕적 대통령제라고 규정했다. 워터게이트 사건이 문제된 미국 대통령제보다 더욱 집중된 권력구조라고 했다. 1987년 체제를 통해 탄생한 5년 단임 대통령제는 존재가치를 상실한 만큼 개헌을 통해 권력 구조를 개편해야 한다는 충정어린 제언까지 내놓았다. 대통령의 말 한마디가 법 위에 존재하고,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못하는 5년 단임 대통령제도 사실상 함께 탄핵된 셈이다.

안 재판관은 현 권력구조의 최대 문제점으로 비선조직의 국정 개입을 꼽았다. 이는 박근혜정부에만 해당되는 게 아니다. 87년 이후 역대 모든 정권에서 비선 ‘최순실’이 존재했다. 황태자, 소통령, 홍삼트리오, 봉하대군, 만사형통 등 이름만 달랐을 뿐이었다. 박 전 대통령 때의 최순실씨는 과거에 존재했던 ‘최순실’에 추가된 또 한 명의 ‘최순실’인 셈이다. 이쯤 되면 대통령 개인을 넘어 제도에서 문제를 찾아야 한다. 현 체제로 조기 대선이 치러진다면 또 한 명의 ‘최순실’이 역사에 추가로 기록될 가능성이 크다.

정치권은 헌재의 박 전 대통령 파면 결정으로 대한민국의 통치체제를 바꾸라는 역사적 임무를 부여받았다. 대통령 탄핵을 이끌어낸 국민의 에너지를 모아 헌법을 개정해 대한민국을 리셋해야하는 책무가 주어진 것이다. 방향은 의외로 간단할 수 있다. 대통령 1인에 집중된 권력을 분산하고 분산된 권력 간에 투명한 상호 견제가 가능하게 하면 되는 것이다. 국민의 3분의 2 이상이 개헌에 찬성하고 있다는 점도 든든한 동력이다.

때마침 국회 헌법개정특별위원회가 13일부터 개헌 실무 작업에 착수했다. 단일 헌법개정안을 마련해 5월 대선 때 국민투표에 부치는 게 1차 목표다. 개헌의 핵심인 권력 분권에는 공감대가 형성돼 있어 단일안 마련이 불가능한 것만은 아니다. 개헌특위는 조기 대선에 구애받지 말고 개헌 로드맵 마련에 매진해야 한다. 더불어민주당을 탈당한 김종인 전 대표를 중심으로 정치권에서는 차기 대통령 임기를 3년으로 줄이고 그 기간 개헌을 완료하는 방안도 거론되고 있다.

문제는 현실적으로 대선 전 개헌이 녹록지 않다는 점이다. 여론조사 1위인 문재인 전 민주당 대표의 완강한 반대 때문이다. 대선 전 개헌은 시간이 부족한 만큼 차기 정부에서 논의하자는 입장이다. 5년 대통령 임기를 채우겠다는 정치적 수사에 불과하다. 87년 헌법개정안이 국회에 제안된 뒤 국민투표까지 걸린 기간은 40일에 불과했다. 개헌은 시간의 문제가 아니라 선택의 문제인 것이다.

대선 전 개헌이 어렵다면 각 당 대선 후보들이 대선 전에 개헌 시점을 못 박도록 강제해야 한다. 개헌특위가 정하는 개헌 로드맵에 승복하도록 하는 해법을 고려해볼 만하다. 이마저 여의치 않다면 차기 대통령 임기 내 개헌을 완수할 의지가 있는 인물을 대선에서 택해야 한다. 말로만 약속한 후보가 대통령이 되면 개헌 약속을 뒤집을 게 뻔하기 때문이다. 개헌은 이제 거스를 수 없는 시대적 소명이다. 이를 간과한다면 제2의 박 전 대통령을 탄핵해야 하는 역사를 곧 되풀이해야 할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