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쪽 곳곳 고심한 흔적 역력”… 헌법학자들이 본 헌재결정문

입력 2017-03-13 05:00
헌법학자들은 헌법재판소의 박근혜 대통령 탄핵심판 사건 결정문이 명확하고 논리적이었다고 입을 모았다. 박 전 대통령 개인에게는 비극이지만 정경유착과 제왕적 대통령제의 폐습을 끊는 전환점이 돼야 한다는 의견이다.

국민일보가 12일 인터뷰한 헌법학자 7명은 89쪽 분량의 헌재 결정문에 대해 “고심한 흔적이 느껴진다”고 평가했다. 건국대 한상희 교수는 “불필요한 사회적 반발을 제거하려고 노력한 것 같다”며 “관점에 따라 다를 수 있는 쟁점을 과감히 기각하고, 권한남용을 공통분모로 파면 결정을 내렸다”고 말했다. 연세대 김종철 교수는 “가장 명확한 사유인 권한남용으로 탄핵을 결정한 논리가 명쾌했다”고 말했다. 서강대 임지봉 교수는 “헌법 원리를 소개하고 사안에 적용해 나가는 전형적인 논리적 체계를 잘 따랐다”고 말했다.

국민 눈높이에 맞추기 위해 결정문을 쉽게 서술한 흔적도 엿보인다는 평가다. 국민 80% 이상이 탄핵에 찬성한 점을 고려할 때 상식적 결정이라는 의견도 나왔다. 경북대 신평 교수는 “국민 뜻을 가장 잘 받드는 게 헌법재판의 핵심”이라며 “국민에게 맞서 다른 결정을 했다면 오히려 헌재의 자기부정이 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충남대 심경수 교수는 “국민이 느낀 분노를 헌재는 ‘국민 신임을 배반했다’고 표현했다”며 “약간의 법률용어를 쓴 것뿐이지 상식적 결정”이라고 말했다.

파면 결정엔 박 전 대통령 태도의 문제도 영향을 끼쳤다는 분석이다. 김종철 교수는 “형사사법 절차를 거부하고, 증거를 은폐하는 듯한 태도를 볼 때 대통령직을 계속 수행하는 게 적절치 않다고 본 것”이라고 지적했다. 한상희 교수는 “대통령의 불법행위가 일시적 실수가 아닌 그간의 국정에 녹아들어 있었다고 본 것 같다”고 했다. 임지봉 교수는 “감시 기능을 하는 언론의 의혹 제기와 국회 견제에 비난으로 일관한 점 등의 행동에도 헌법 수호 의지가 보이지 않는다고 본 것”이라고 평가했다.

세월호 참사 등 나머지 탄핵 사유가 인정되지 않아 아쉽다는 의견도 있었다. 한상희 교수는 “세월호 참사의 경우 박 전 대통령이 고의적으로 간과한 부분도 있다”며 “외국 법리 등을 검토하면 쉽게 기각할 수 없는 부분”이라고 말했다. 임지봉 교수는 “다른 소추 사유의 증거가 불충분했기 때문이지 혐의가 없었다는 게 아니다”며 “검찰이 수사하면 얼마든지 법적 책임을 물을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고려대 장영수 교수는 “세월호 사고의 경우 차기 대통령도 이런 부분을 쉽게 생각하지 말라는 뜻을 보충의견에 담은 것”이라고 말했다.

헌법학자들은 이번 결정이 시스템 개선 계기가 돼야 한다고 조언했다. 동국대 김상겸 교수는 “정경유착과 대통령의 권한남용은 용서받지 못한다는 기준을 제시했다”며 “헌법 개정이 필수적이라는 시그널도 줬다”고 말했다. 장영수 교수는 “차기 대선 후보 주변에 최순실씨 같은 사람이 있는지 등을 철저히 검증해야 한다”며 “권한 오남용을 검찰 등이 사전에 전혀 통제하지 못하는 문제도 드러냈다”고 지적했다.

나성원 기자 naa@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