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9년 3월 13일 중국 북간도 룽징(龍井)에서 펼쳐진 ‘룽징 3·13독립만세운동’ 98주년을 맞아 당시 만세 운동이 크리스천들에 의해 주도됐던 사실이 새롭게 조명되고 있다.
12일 ㈔규암김약연기념사업회에 따르면 국내에서 3·1운동이 시작된 지 열이틀 째인 13일 정오 룽징에 있는 천주교 예배당 종소리를 신호로 학생과 교사, 교인과 주민 등 3만여명이 모여들었다. 이들은 예배당 옆 서전평야에서 ‘대한독립 만세’를 외쳤다. 당시 ‘야소교학교(미션스쿨)’였던 명동·정동 학교의 교사·학생들로 구성된 무장투쟁단체인 ‘충렬대’ 회원들은 일본 영사관 앞으로 행진을 벌였다.
이를 기점으로 북간도 주요 지역에서 3개월 동안 만세운동이 이어졌다. 기념사업회 김재홍 사무총장은 “당시 만세운동은 북간도에 한인이 거주하기 시작한 이래 최대 규모로 벌어진 만세운동이었다”며 “이후 만주 전역의 만세운동에 영향을 미쳤다”고 평가했다.
독립선언포고문 주도, 무장항쟁도
3·13만세 운동의 구심점은 당시 ‘간도 대통령’으로 불리던 크리스천 김약연(1868∼1942) 선생이었다. 윤동주(1917∼1942) 시인의 외삼촌인 그는 교육자이면서 훗날 목사 안수까지 받은 크리스천 지도자였다.
김약연 선생은 3·13만세운동을 주도한 조선독립기성총회를 진두지휘하면서 ‘독립선언포고문’ 작성을 주도했다. 포고문은 ‘우리 조선 민족은 민족의 독립을 선언하고, 민족의 자유를 선언하며, 민족의 정의를 선언하고…’로 시작된다. 3·1운동 때 선포됐던 ‘기미독립선언서’와 비슷한 형식이지만 일제에 대해 무장독립투쟁을 전개하겠다는 의지가 강하게 담겨 있다.
포고문 끝에는 ‘김약연’을 시작으로 총 17명의 지도급 인사 명단이 적시돼 있다. 기념사업회는 김약연 선생을 중심으로 이들 모두가 크리스천이라는 사실을 최근 파악했다.
대한민국역사박물관 김시덕 교육과장은 “기미독립선언문을 작성한 33명 중 16명이 크리스천이었던 점과 비교할 때 당시 북간도 기독교의 영향력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라고 말했다.
교회 조직, 봉오동·청산리 전투 근간으로
룽징 3·13만세운동은 물론이고 북간도의 독립운동 자체가 교회 조직 없인 불가능했다는 게 사학자들의 견해다. 1907년 김약연 선생은 북간도 한인들의 자치조직으로 ‘교민회’를 비롯해 ‘간민회’ ‘간도국민회의’ 등을 조직하거나 이들 단체에서 활동했는데, 그 기반이 조직교회 30여곳과 미조직교회 및 기도처 70여곳 등 100곳이 넘는 북간도 현지 교회였다.
이들 교회와 성도는 이후 타 종교 및 독립운동 단체들과 뭉쳐 봉오동 전투(1920년 6월), 청산리 대첩(1920년 10월)까지 치르면서 독립운동 단체의 근간으로 활약했다.
김 사무총장은 “앞으로 2년 후 3·1운동 100주년을 기념할 때, 두만강 건너에서 펼쳐졌던 룽징 3·13 만세운동과 교계를 중심으로 펼쳐진 현지 독립운동을 함께 조명할 가치가 있다”고 강조했다.
박재찬 기자 jeep@kmib.co.kr
[‘북간도 기독교’를 찾아서] (上) 북간도 독립운동 기독교인들이 주도했다
입력 2017-03-13 0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