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전 대통령, 권한남용·은폐… 헌법 수호 의지 없다”
입력 2017-03-10 17:59 수정 2017-03-10 21:12
박근혜 전 대통령은 40년 지기(知己) 최순실씨와 함께 추락했다. 헌법재판소는 박 전 대통령이 국민이 아닌 최씨를 위한 대통령이었다고 판단했다. 국민으로부터 위임받은 대통령의 권한을 사적 용도로 남용하고 이를 은폐한 죄만으로도 대통령직을 수행할 자격이 없다는 게 헌재가 내린 결론이다. 국민의 신임을 배반한 행위라는 것이다.
崔씨의 국정농단을 도운 罪
헌재는 국회가 제기한 13가지 탄핵소추 사유 중 최씨의 국정농단과 연결된 부분을 특별히 주목했다. 최씨는 2013년 1월부터 3년 이상 정호성 전 청와대 부속비서관을 통해 각종 현안과 정책 보고서, 인사자료, 대통령 해외순방 일정 등의 기밀문건을 다량으로 제공받았다. 헌재는 최씨가 이 내용을 수정하거나 박 전 대통령의 일정을 조정하는 등 비밀리에 대통령 직무에 개입했다고 봤다. 사실상 청와대 바깥에 또 하나의 청와대가 존재했던 셈이다. 헌재는 “피청구인(박 전 대통령)의 지시나 묵인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라고 단정했다.
아무런 법적 권한이 없는 최씨가 김종 전 문화체육관광부 차관이나 차은택 전 문화융성위원회 위원 등 수족으로 부릴 인물을 박 전 대통령을 통해 공직에 앉힌 부분도 지적됐다. 박 전 대통령은 자동차 부품업체 KD코퍼레이션의 현대자동차 납품, 최씨가 설립한 광고회사 플레이그라운드의 대기업 물량 수주, KT 인사 개입 등 최씨의 돈벌이 사업도 지원했다. 대기업 자금 774억원으로 세워진 미르·K스포츠재단 역시 최씨의 이권을 챙겨주려는 목적에서 박 전 대통령이 설립을 지시했다는 게 헌재의 판단이다. 헌재는 “법적 근거와 절차 없이 비밀리에 대통령의 권한을 이용해 기업들이 재단에 출연토록 한 행위는 기업의 재산권 및 기업 경영의 자유를 침해한 것”이라고 밝혔다.
헌재는 박 전 대통령이 최씨의 국정개입을 허용하고, 자신의 권한을 남용한 부분이 헌법과 국가공무원법, 공직자윤리법 위배에 해당한다고 규정했다.
헌재가 법 위배라고 판단한 사안들은 지난해 10∼12월 검찰 특별수사본부가 밝혀낸 범죄사실이 주요 근거가 됐다. 박영수 특별검사팀이 수사해 입건한 삼성 뇌물수수 혐의나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개입 혐의는 결정문에 언급되지 않았다. 검찰 단계에서 드러난 국정농단의 심각성만으로도 박 전 대통령의 퇴장을 선언하기에 충분했다는 뜻이다.
국정농단을 은폐한 罪
헌재는 박 전 대통령이 취임 직후부터 장기간 적극적·반복적으로 위법행위를 저질러 온 대목을 중대하게 인식했다. 특히 대통령의 지위를 악용하고 국가 기관과 조직을 동원했다는 점에서 법 위반 정도가 매우 엄중하다고 했다. 박 전 대통령이 최씨의 국정개입 사실을 철저히 숨기면서, 관련 의혹이 제기될 때마다 이를 부인하면서 오히려 의혹 제기 자체를 비난했던 사실도 파면의 주요 사유가 됐다. 박 전 대통령의 맹목적인 최씨 비호 속에 권력분립 원리에 따른 국회 등 헌법기관의 견제나 언론의 감시 장치가 제대로 작동될 수 없었다고 헌재는 설명했다. 이런 대통령의 처사야말로 안종범 전 청와대 정책조정수석, 김 전 차관 등이 최씨와 공모해 부패 범죄를 저지르는 토양이 됐다는 것이다. 헌재는 “최씨의 사익 추구를 돕고 이를 은폐한 건 대의민주제 원리와 법치주의 정신을 훼손한 행위이자 대통령으로서의 공익실현 의무를 중대하게 위반한 것”이라고 말했다.
국민을 배반한 罪
박 전 대통령이 국정농단 파문이 확산되는 와중에도 거듭 의혹을 부인하고 검찰과 특검의 대면조사 및 청와대 압수수색을 거부한 행위는 끝내 부메랑이 됐다. 헌재는 “국민 신뢰를 회복하고자 하는 노력을 하는 대신 진실성 없는 사과를 하고 국민에게 한 약속도 지키지 않았다”며 “피청구인의 언행을 보면 헌법 수호 의지가 드러나지 않는다”고 질책했다.
헌재는 박 전 대통령이 국민의 신임을 배반했으며, 헌법 수호의 관점에서 용납될 수 없는 중대한 법 위배 행위를 했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결국 재판관 전원일치로 “국민으로부터 직접 민주적 정당성을 부여받은 대통령을 파면함으로써 얻는 헌법 수호의 이익이 파면에 따른 국가적 손실을 압도할 정도로 크다”는 결정이 내려졌다. 10일 오전 11시21분, 박 전 대통령은 대한민국 헌정사 최초로 사법 판단에 의해 쫓겨난 국가원수로 기록됐다.
글=지호일 기자 blue51@kmib.co.kr, 그래픽=전진이 기자, 안지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