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법재판소가 대한민국 헌정 사상 처음으로 대통령을 파면했다. 헌재 재판관 8인 전원일치 의견이다. 헌재의 결정은 박근혜 전 대통령 본인은 물론이고 우리 정치·사회에도 씻기 힘든 오점으로 남게 됐다.
대통령도 정치권력도 법 앞에 평등
대한민국 현대사는 2017년 3월 10일 헌재의 대통령 탄핵 인용 이전과 이후로 구별돼야 한다. 대통령 탄핵은 이른바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라는 단순한 사건의 결과가 아니다. 정치·사회·경제·문화 분야 등 그동안 대한민국 공동체 상층부 곳곳에서 횡행하던 부조리와 부패, 봉건적 행태에 기반한 후진성이 임계점을 넘어 폭발한 사태다. 물밑에서 음습하게 벌어지던, 권력의 힘으로 찍어 누르던 이전 시기에는 드러나지 않았던 일들이 한꺼번에 터진 것이다. 그것이 게이트라는 이름의 적나라한 구조적 사건으로 표출됐고, 대통령 탄핵 사태로까지 이어졌다. 따라서 헌재의 선고는 우리 역사에서 한 획을 긋는 엄중한 의미가 있다. 대통령이나 어떤 정치권력도 법 위에 군림할 수 없다는 원칙도 보여줬다.
헌재는 박 전 대통령이 최순실의 이익을 위해 대통령의 지위와 권한을 남용했고, 기업의 재산권을 침해했으며, 국가공무원법의 비밀엄수 의무를 위배했다고 판단했다. 이에 따라 그가 대의민주제 원리와 법치주의 정신을 훼손했고, 헌법 수호 의지도 부족했다고 적시했다. 또 국민의 신임을 배반했고, 파면함으로써 얻는 헌법 수호 이익이 압도적으로 크다고 분명하게 규정했다.
헌재의 결정이 주는 메시지는 명확하다. 대통령 또는 대통령 권력의 공공성과 정의로움, 책임성이 무엇보다 중요하며 박 전 대통령에 의해 훼손된 이 같은 가치가 시급히 회복돼야 한다는 뜻이다. 지난 100여일 동안 벌어진 일들을 볼 때 우리 사회가 그동안 물질적 성장을 이뤄냈는지는 몰라도 정신적 성장이 따라가지 못한 공동체임을 부인할 수 없다. 최고위 공직자와 그 주변에서 벌어진 일탈행위는 평범하고 건실하게 살아가는 이 땅의 모든 이들에게 깊은 상처를 주었다. 정경유착이나 천민자본주의적 행태, 온갖 편법과 불법행위 등이 생생한 사례다. 헌재가 지적한 대로 박 전 대통령의 법 위배 행위가 헌법질서에 미치는 부정적 영향과 파급효과는 중대하다. 하지만 그런 상처가 크다고 이대로 주저앉을 수는 없다. 전임 대통령에 대한 판단은 끝났지만 우리 앞에는 탄핵 이후 상황을 잘 관리해야 할 숙제가 남아 있다. 국민 개개인이 인식하고 있어야 할 의무이기도 하다.
헌재 선고 이후 우리 공동체는 달라져야 한다. 아니 다르게 만들어야 한다. 우리에게는 위기가 닥치면 함께 힘을 모으는 저력이 있다. 그런 경험도 있다. 이제 논란을 끝내고 대열을 정비해 앞으로 나아가야 할 때다. 질서 있는 수습이 필요하다.
朴, 사과와 화합 표명이 마지막 예의
질서 있는 수습은 어떻게 해야 하나. 이 시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박 전 대통령의 발언이다. 단순한 승복을 넘어 분열과 차이보다는 화합과 통합이 더욱 절실하다는 진실된 의견을 표명해야 한다. 석 달 이상 이어진 극심한 갈등과 분열의 치유를 위해, 통합과 민주주의를 위해 발언을 해야 한다. 당사자가 그렇게 한다면 어느 정치인의 발언보다 진정성 있게 다가올 수 있다. 그것이 그가 결혼했다는 국가에 대한 충성이자 국민에 대한 마지막 예의다. 끝내 그런 입장이 나오지 않는다면 그저 맹신자들의 지지만 받는 실패한 정치인 중 하나일 뿐이다. 그가 헌재 선고를 겸허히 받아들이고 지지자들에게 자제와 화합을 당부함으로써 몰락한 정치인 행태가 아닌, 최소한의 정직함을 보여주기 바란다. 남은 검찰 수사에도 협조해야 함은 당연하다.
둘째, 정치권과 대선 주자들은 침착하고 냉정하게 행동해야 한다. 앞으로 60일의 대통령 선거운동 기간에 정국은 정치권과 대선 주자들이 주도할 것이다. 탄핵 사태까지 이르게 된 책임에서 정치권은 자유롭지 못하다. 혹여 각 정파가 유리한 선거 환경을 만들기 위해 일부 시민들의 휘발성 높은 감성을 교묘하게 이용하려 한다면 그것은 망국적 정치행위다. 결과적으로 거대한 역풍을 맞게 된다는 점을 깊이 인식해야 한다. 침묵하는 다수 국민의 합리적 판단은 생각보다 강력하다. 그런 저급한 전략쯤은 금방 알아챌 능력이 있다. 특히 대선 주자들은 상황을 판단하고 행동을 결정하는 데 신중을 기하기 바란다.
셋째, 국민들에게 보다 냉철한 이성으로 작금의 정국을 바라볼 것을 호소한다. 대통령 탄핵은 불행한 사태지만 하나의 큰 흠결을 매듭짓고 다시 출발하는 계기가 돼야 한다. 일탈적 상황을 정상 궤도로 복귀시키는 데 가장 크게 작용하는 힘은 여론이다. 극단적인 양쪽 지지층의 선동적 언동은 서로가 적대적 공생관계를 위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 그들에겐 나라의 미래보다 자기편의 안위와 이익만 있을 뿐이다. 합리적 시민들의 냉정하고 이성적인 비판이 그들의 무분별한 행동을 중지시킬 수 있다. 촛불이나 태극기 집회는 이제 그만 할 때가 됐다. 광장의 함성과 그들의 희망은 제도권의 정상적 기능과 선거 등을 통해 구현되는 게 민주주의다.
시민 모두에게 새 시대 열어갈 책무 있어
대통령 직무정지라는 불확실성은 해소됐다. 그러나 대통령 탄핵이라는 사태가 이어지고 조기 대선을 치러야 하는 지금, 대한민국은 외교·안보·경제 등에서 동시다발적 위기에 직면해 있다. 소통하며 합심해 국가 위기를 극복해야 할 시점이다. 다른 의견도 존중하고 합의점을 찾아가야 할 때다. 그런 차원에서 대통령 파면은 공공성을 회복하고 새 시대를 열어가는 출발점이 돼야 한다. 그렇게 해야 할 책무가 모든 시민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지워져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미증유의 탄핵 사태를 잘 극복해 훗날 역사가 이 시기를 ‘대한민국이 승리했다’고 기록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사설] 대통령 파면 이전과 이후의 대한민국은 달라야 한다
입력 2017-03-10 18: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