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보, 내 메이저리그 코치 됐다. 한국 최초데이.” “오, 하나님 감사합니다.” 아내는 그 자리에서 울음을 터뜨렸다. “아빠, 정말 축하해요.” 두 아들도 내가 꿈에 그리던 메이저리그 코치가 됐다는 사실에 얼싸안고 야단이 났다.
이튿날 메이저리그 소속 의사가 집에 왔다. 소변과 혈액을 검사하고 몸 상태를 일일이 체크했다. 내가 어떻게 메이저리그 코치로 발탁됐는지 궁금해졌다. 훗날 얘기를 들어보니 게리 워드가 나를 적극 추천했다고 한다.
“단장님, 마이너리그팀 코치 중에 만수 리가 있습니다. 이 친구 실력이 아주 좋습니다.”
‘냄새 나니 저리 가라’며 그렇게 못살게 굴던 워드가 나를 추천한 것이다. 미국 시카고 화이트삭스에서도 내가 체드 모톨라와 틸슨 브리토 등을 남몰래 도왔던 것을 훤히 알고 있었다. 매일 선수를 어떻게 지도하고 그 선수의 실력이 어떻게 향상되는지, 팀워크에 어떤 기여를 하고 있는지 수치화했다고 한다. 한마디로 나의 일거수일투족을 꿰차고 있었던 것이다.
2000년 드디어 한국인 최초의 메이저리그 불펜코치 생활이 시작됐다. 시카고 화이트삭스는 1901년 창단됐으며, 부임 당시 월드시리즈 2회, 아메리칸리그 6회, 중부지구 리그에서 3회 우승한 역사 깊은 구단이었다. 홈구장은 4만4300여명을 수용할 수 있는 유에스 셀룰러필드였다.
메이저리그는 마이너리그와 확실히 달랐다. 메이저리그 30개 구단에서 크리스천 코치와 선수들이 예배를 드릴 수 있도록 예배 인도자와 장소까지 마련해 줬다. 이동할 땐 전용기만 이용했다. 내 자리는 선수들 좌석 앞쪽 비즈니스석이었는데, 사실상 특급좌석이었다. 구단 소속 승무원도 상냥했다. “리, 여기 앉으시면 됩니다. 모시게 돼 영광입니다.” ‘Man-Soo Lee.’ 각 좌석마다 이름표까지 붙어 있었다.
검은색 상의에 찍혀있는 흰색 SOX 글씨와 MLB 마크가 훈장처럼 느껴졌다. 내 등번호는 59번이었다. ‘오직 구원을 위하라는 뜻이구나. 주님, 저에게 이런 과분한 자리를 주셔서 감사합니더. 주님 영광 높이는 데 힘쓰겠습니데이.’
경기를 마치고 미국 시카고 미드웨이 국제공항에 도착했다. 활주로에 내리니 검은색 리무진 수십 대가 기다리고 있었다. 연봉을 수백억원씩 받는 선수들을 위한 배려였다. ‘특급 선수들은 확실히 다르군.’ 나는 차가 없었다. 구단 관계자에게 “노란 택시나 한 대 불러 달라”고 했다.
“리, 무슨 이야기냐. 너의 차도 저 밑에 있다.” “뭐라꼬. 내한테도 리무진을 준다고.” 번쩍거리는 리무진을 타고 일리노이 주 작은 마을에 들어서니 동네가 들썩였다. 시카고 화이트삭스 코치가 근처에 산다는 것 자체가 빅뉴스였던 것 같다. 그것도 동양인이 말이다. 사람들이 리무진 앞에서 사진을 촬영하고 난리가 났다. 이웃들에게 사인을 해주고 인사를 받느라 진땀이 났다.
메이저리그 코치 생활은 행복했다. 하지만 늘 마음 한구석엔 내 조국 대한민국에 대한 그리움이 있었다. 연어가 산란기 강을 거슬러 다시 고향을 찾듯이 말이다. 마침 2003년 한국 유명 구단에서 배터리 코치 제의가 들어왔다. ‘아, 이게 하나님의 뜻인가 보다.’ 시카고 화이트삭스 구단주인 제리 레인스도프를 찾아갔다. 그는 프로농구팀 시카고 불스도 맡고 있었다.
“한국에 가서 미국의 선진 야구를 전수하고 싶습니다.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제리는 내가 내민 사표를 흔쾌히 받아들이며 격려해줬다. 집과 자가용을 팔고 한국으로 돌아갈 날만 기다리고 있는데 한국 신문에서 이런 뉴스가 나왔다. ‘OO구단, 이만수 코치와 계약 없던 일로’.
정리=백상현 기자 100sh@kmib.co.kr
[역경의 열매] 이만수 <11> 한국인 첫 메이저리그 코치 되자 아내 눈물
입력 2017-03-13 0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