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대통령이 10일 파면됐다. 대한민국 헌정사상 첫 ‘파면 대통령’이다. 오명과 함께 19년 정치 인생에 마침표를 찍었다. 정계 입문 15년 만에 권력 최정점에 올랐으나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로 임기를 채우지 못했다. 첫 여성 대통령이자 부녀(父女) 대통령의 영광도 빛이 바랬다.
젊은 시절 박 전 대통령은 ‘은둔의 18년’을 보냈다. 1979년 11월 박정희 전 대통령 서거 이후 청와대에서 나와 97년 12월 한나라당에 입당하기까지 베일에 가려진 시간이었다. 이 시절 박 전 대통령은 육영재단과 정수장학회 이사장을 맡은 것을 제외하면 외부 활동이 거의 없었다. 박정희 전 대통령 10주기인 89년을 즈음해 박정희 기념사업회를 발족하며 조금씩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박 전 대통령은 90년대 들어 정치권으로부터 여러 차례 러브콜을 받았다. 97년 15대 대선 직전 이회창 한나라당 후보의 지원 요청을 받고 한나라당에 입당했다. 대구 달성에서 내리 4선(15·16·17·18대)을 했고, 19대 국회에선 비례대표를 했다.
박 전 대통령은 2000년 5월 한나라당 부총재에 선출됐다. 여성 몫의 지명직 부총재 자리를 마다하고 경선에 출마해 당선됐다. 이후 이회창 총재의 ‘1인 체제’를 비판하면서 당내 민주화를 요구했고, 불화가 깊어지자 2002년 2월 탈당했다. 한국미래연합이라는 당을 만들었으나 지지율이 바닥을 쳤다. 그해 12월 대선을 앞두고 한나라당에 복당했다.
박 전 대통령은 2004년 3월 17대 총선을 앞두고 당대표로 선출됐다. 당시 한나라당은 암흑기였다. 97년과 2002년 대선에서 연달아 패배해 ‘불임정당’이라는 비아냥거림을 들었다. 대선자금 ‘차떼기’ 파문으로 최병렬 당시 대표가 사퇴하는 총체적 난국이었다. 노무현 전 대통령 탄핵 역풍을 맞아 총선 패색이 짙었다. 박 전 대통령은 천막 당사를 발판삼아 121석을 얻어냈다. 이때부터 2006년 6월 대표 자리에서 물러날 때까지 2년3개월간 거의 모든 선거에서 이겼다. ‘선거의 여왕’이란 별칭도 이때 붙었다. 2006년 5월 지방선거 유세 때 서울 신촌에서 면도칼 피습을 당했다. 봉합수술에서 깨자마자 “대전은요?”라고 물어 경합이던 대전 판세를 뒤집었다는 일화도 있다.
박 전 대통령은 ‘본선보다 치열했던 경선’으로 평가받는 2007년 한나라당 대선 후보 경선에서 이명박(MB) 후보와 맞붙었다. 박 전 대통령은 당원, 대의원, 국민선거인단 경선에서 이겼지만 여론조사에서 뒤져 패했다. MB정부에서 치러진 18대 총선에선 박 전 대통령을 따르던 의원들이 대거 공천 탈락했다. 이때 “나도 속고 국민도 속았다”는 말을 남기고 대구 달성으로 내려가 17일간 칩거했다. 공천 탈락자들은 친박연대 또는 무소속으로 출마해 22명이 당선됐다. 특정인을 지지하는 정당 이름이 등장한 건 정당 사상 유례없는 일이었다. 총선 이후 당 안팎의 친박은 50여명으로 몸집을 키웠다.
박 전 대통령은 의정 활동을 하며 딱 한 번 국회 본회의장에서 반대토론을 했다. 2010년 6월 세종시 수정안 표결 때다. 그는 “미래로 가려면 약속은 반드시 지킨다는 신뢰가 있어야 한다”며 세종시 원안을 고수했다. 수정안은 부결됐다. 박 전 대통령이 ‘원칙과 신뢰의 정치인’이라는 타이틀을 얻게 된 계기였다.
2011년 12월 박 전 대통령은 다시 한 번 당의 구원투수로 등판했다. 선관위 디도스 공격 사건으로 지지율이 바닥을 쳤을 때다. 비상대책위원장을 맡아 당명을 새누리당으로 바꾸고 당헌에 경제 민주화를 넣었다. 이듬해 치러진 총선에서 새누리당은 단독 과반 의석을 확보하는 대역전극을 썼다. 그 여세를 몰아 대선에서 승리했다.
정치인 박근혜는 승승장구했으나, 대통령 박근혜는 달랐다. 집권 초부터 곳곳에서 잡음이 났다. 불통(不通), 인사실패는 해를 거듭할수록 심해졌다. 집권 2년차 세월호 참사 때는 무능·무책임·무대책의 민낯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2014년 연말 정윤회 등 비선실세의 국정개입 의혹이 제기됐다. 하지만 이는 곧 ‘청와대 문건 유출’로 초점이 옮겨져 흐지부지 마무리됐다. 다시 정국 주도권을 틀어쥔 박 전 대통령은 공공·노동·교육·금융 등 4대 구조개혁을 밀어붙였지만 좀처럼 힘을 받지 못했다. 급기야 지난해 4월 총선에선 새누리당이 참패해 122석의 원내 2당으로 전락했다. 청와대의 불통, 친박의 독선적인 공천이 패배 원인으로 지목됐다. 16년 만에 여소야대 정국이 조성되면서 입법 권력은 야당으로 넘어갔다.
박 전 대통령은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가 본격화된 지난 10월 이후 세 차례 대국민 담화를 발표했다. 매번 민심을 돌리기엔 부족했다. 결국 지난해 12월 9일 국회에서 탄핵소추안이 찬성 234, 반대 56의 압도적 표차로 가결됐다. 박 전 대통령은 직무가 정지돼 청와대 관저에서 칩거했다. 검찰 조사는 물론 특검 수사에 성실히 임하겠다는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영욕이 교차했던 박근혜의 19년 정치는 끝났다.
글=권지혜 기자 jhk@kmib.co.kr, 그래픽=박동민 기자
최초 여성·부녀 대통령 → 최초 파면 대통령 ‘추락’
입력 2017-03-11 00: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