뱀은 그리스 신화에서 다산과 풍요, 재생과 불멸의 상징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예언자 이사야는 뱀이 흙을 먹이로 삼는 것을 유토피아를 묘사하는 상징으로 삼고 있습니다(사 65: 25).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시편은 악인과 포악한 자들을 뱀처럼 혀를 벼리고, 입술 아래에는 독사의 독을 품고 있는 자들로 묘사하는가 하면(시 140:3) 예수님은 바리새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을 ‘지옥의 심판을 피할 수 없는 뱀들, 독사의 새끼들’(마 23:33)이라고 혹독하게 비난하십니다.
그런데 창세기에 의하면 ‘뱀은 주 하나님이 만드신 모든 들짐승 가운데서 가장 간교(奸巧)하였다’(창 3:1)고 합니다. 그렇다면 창세기 기자가 생각하는 뱀은 악마적 세력이나, 사탄의 상징이 아닙니다. 창세기는 뱀도 하나님의 피조물로 생각함으로써 악이나 유혹을 외부에서 온 세력이나 실체로 대상화시키지 않고 있습니다. 뱀은 단순히 다른 짐승들보다 더 영리하다는 점에서 구별될 뿐입니다. 그렇다면 악은 외부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사실 인간 자신에서부터, 인간 스스로의 선택의 결과라고 할 것입니다.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는 말은 그런 의미에서 틀린 말입니다. 죄와 죄인은 분리될 수 없습니다. 죄를 짓기 때문에 죄인이 되는 것이기는 하지만, 사실은 죄인이 죄를 짓는 법입니다. 사람이 시(詩)도 짓고, 집도 짓는 것처럼 죄도 사람이 짓는 것입니다.
창세기 기자는 뱀과 인간의 타락 이야기에서 죄는 외부에서 들어온 악에 의해서 지어지는 것이 아니라, 인간 스스로의 선택과 결단에 의해 지어지는 것임을 분명히 보여줍니다. 굳이 유전자 결정론자가 아니어도 우리는 경험적으로 쓴 샘에서 쓴물이 나오고, 단 샘에서 단물 나온다는 것을 압니다. 인간의 변화와 회개 가능성을 부인하지는 않는다고 해도, 악한 생각은 악한 행동으로 드러나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에덴동산의 뱀의 간교함과 사악함은 뱀이 거짓을 말하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진실을 말하지도 않았다는 데 있습니다. 뱀은 단지 강조점을 변경시키고, 반진반위(半眞半僞)의 모호한 질문으로 인간이 스스로 결단을 내리도록 유혹하고 충동을 불러일으켰을 뿐입니다. 그리고 범죄한 인간은 ‘책임’이 아니라 ‘핑계’에서 출구를 찾습니다. ‘어쩔 수 없었다고’ ‘그런 상황에서는 당신도 그렇게 했을 것이라고’ ‘다른 여지가 없었다고’ ‘목구멍이 포도청이어서 그랬다고’ ‘부끄럽고 두려워서 그랬다고’ 책임을 회피하거나 전가하는 이유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예 할 때에는 예라는 말만 하고, 아니요 할 때는 아니요라는 말만 하여라. 이보다 지나치는 것은 악에서 나오는 것이다’(마 5:37)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여러분에게 선포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예도 되셨다가 동시에 아니요도 되신 분이 아니었습니다’(고후 1:19)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양비론자’나 ‘양시론자’가 아니었습니다. 이 둘은 이란성 쌍둥이입니다. 누구로부터도 비난받지 않고, 언제든지 자신을 정당화하고, 책임을 타인에게 전가할 수 있는 약방의 감초 같은 것이 양비론이고 양시론입니다. 그러나 책임적 신앙인은 예와 아니요를 분명히 하는 사람입니다.
대통령 탄핵을 둘러싸고 갈등하고 있는 이른바 촛불과 친박 단체들에 대하여 양비론이나 양시론의 입장을 취하는 기독교인들이 있습니다. 이들 때문에 기독교 자체가 위기에 빠지고 모독을 받고 있는 것이 안타깝습니다. 하나님께서 모독을 받는 것은 하나님을 믿는 기독교인들이 모독 받을 짓을 하기 때문입니다(롬 2:24). 지금은 믿음 없이는 하기 어려운 예와 아니요를 분명히 해야 할 때입니다.
채수일 경동교회 담임목사
[바이블시론-채수일] 에덴동산의 뱀
입력 2017-03-09 17: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