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이만수 <10> “헬프 미, 리” 타격교습 애원하는 선수들

입력 2017-03-10 00:00
이만수 감독(오른쪽)이 1999년 겨울 미국 시카고에서 개최된 교민행사에서 금일봉을 받고 있다.

흑인 야구선수 출신인 게리 워드의 눈치를 보며 1루 작전 코치에만 집중했다. 미국 켄터키 주로 원정경기를 갔을 때다. 호텔에서 쉬고 있는데 도미니카 선수가 왔다. “리, 나 좀 도와줘. 메이저리그에 있다가 마이너리그로 떨어지니 가족을 먹여 살리기 너무 힘들어. 한국에서 홈런왕이었다고? 플리즈….”

“내는 워드와 약속을 해서 절대 안 된다.” “리, 플리즈.” 애처로운 눈빛을 거절하기 힘들었다. “니 절대 말하면 안 된다. 알았지?” “오케이.” “니 이것 좀 봐라.” 도미니카 선수에게 노트북을 보여주자 눈이 휘둥그레졌다. 25년간 하루도 빠짐없이 적어온 야구일기 파일을 열었다. 매일 25명 선수들의 몸 상태와 타격자세, 장·단점, 안타유형 등을 기록한 데이터가 들어있었다. 손짓 발짓을 하며 타격 폼을 지도했다.

타율이 1할을 겨우 넘기던 그는 2개월 만에 3할 대 타자가 됐다. 승부욕과 배우고자 하는 열정이 남달랐다. 자세만 약간 교정했는데도 금세 효과가 나타났다. 몇 개월 뒤였다. “똑똑.” 또다시 노크소리가 났다. 키가 196㎝인 체드 모톨라였다. “헬프 미, 리.” 모톨라는 바닥에 철퍼덕 앉더니 내 다리를 붙잡고 늘어졌다. “리, 네가 도미니카 친구를 도와줬다며. 나도 좀 살려줘.” “아, 그 자슥 말하지 말라니까.” “리, 나는 미국인이다. 절대 말 안할게.” “알았다. 일나라.”

“자 봐라. 자슥아. 니는 키도 큰 놈이 배트를 들고 도끼로 나무 찍듯이 아래로 내리 꽂으니 공이 땅볼이 되는 거야. 이렇게, 골프 치듯 퍼 올리라고. 알았나. 글카고 너 플레이보이냐. 여자 너무 좋아하지 말그라.” “오, 예스.” 모톨라의 실력도 몰라보게 향상됐다. 훗날 삼성 라이온즈 용병으로 한국에 왔던 틸슨 브리또도 그렇게 개인교습을 해줬던 선수다. 소문은 금세 워드의 귀에 들어갔다.

“리, 나 좀 봐야겠다.” 워드의 두툼한 입술이 실룩거렸다. “처음에 내가 뭐라고 했지.” “내가 뭘.” “마늘냄새 나는 동양 놈이 건방지게…. 또다시 내 영역을 침범했다간 넌 끝이야.” 손에서 우드득 소리가 났다. 모멸감마저 느껴졌다. “알았다. 미안. 다시는 안 그럴게.”

파란 하늘을 보니 아내 얼굴이 떠올랐다. 고국을 떠난 지 벌써 2년이나 됐다. 동양인이라고 멸시천대까지 받으니 마음이 흔들렸다. 수화기를 들어올렸다. 아내가 잠결에 받았다. “여보.” “어머, 웬일이세요.” “당신, 미국 안 들어오면 내 콱 죽을끼구마. 어트케 할끼고.” 갑자기 아내의 황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보, 무슨 일 있죠. 다른 생각 마세요. 아이들이랑 최대한 빨리 갈게요. 절대 엉뚱한 짓 마세요!” 10일 만에 아내와 두 아들이 미국으로 들어왔다. 하나님이 허락하신 가족의 힘은 정말 대단했다. 남자와 여자가 만나 가족을 이루도록 디자인하신 이유가 다 있었다.

1999년 9월말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내가 속한 시카고 화이트삭스 트리플A팀은 30개 마이너리그 팀 중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그라운드에서 선수들과 펄쩍펄쩍 뛰며 승리를 만끽하는데 워드가 성큼 다가왔다. “리.” “머가 또 불만이고.” “미안하다. 네가 코치를 너무 잘해서 내 자리를 뺏는 줄 알았다. 내가 오해했다.” “머라 카노. 자슥아.” 우리는 얼싸안고 그간의 앙금을 풀었다. 비록 마이너리그지만 미국 야구를 체험하고 팀의 승리도 경험했으니 이제 마무리하고 한국으로 들어가고 싶었다. 고국으로 가는 꿈에 젖어 있는데 2년 전 나를 소개했던 에이전트한테서 전화가 걸려왔다. “만수야.” “와.” “니 메이저리그 들어가고 싶나.” “자슥아, 장난치지 마라.” “니 메이저리그 코치 됐다.” “머라꼬?”

정리=백상현 기자 100sh@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