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자들의 열악한 근로환경을 고발한 소설집 ‘폐허를 보다’로 지난해 만해문학상을 수상한 이인휘(59·사진) 작가가 12년 만에 장편소설 ‘건너간다’(창비)를 펴냈다.
제목은 1998년 정태춘이 발표한 노래 ‘건너간다’에서 빌려왔다. 소설의 스토리도 ‘음유적 민중가수’ 정태춘에 빚졌다. 그의 노래 ‘92년 장마, 종로에서’를 비롯해 10곡의 노래 가사가 인용돼 있다.
아픈 아내를 간호하며 식품공장에서 일하는 ‘나’(박해운)는 노동자 소설가다. 아내 병수발 때문에 소설 작업을 완전히 잊고 지내던 그는 어느 날 새삼 창작 의욕에 불탄다. 우연히 찾은 CD 한 장에서 ‘하태산’의 노래 ‘92년 장마, 종로에서’를 들으면서 종적을 감춘 그의 삶을 소설을 통해 복원하고 싶은 마음이 든 것이다.
소설은 호떡 찐빵 등을 만드는 식품 공장에서 일하는 현재의 삶과 대학 중퇴 후 공장과 노동판을 전전해야 했던 과거의 삶이 격자무늬를 그리며 맞물려 이어진다.
그의 삶에는 현대사의 굴곡이 깊이 패여 있다. 강제징집 당하듯 끌려간 형의 월남전 참전, 광주항쟁과 전경들의 캠퍼스 무단 침입, 학생들의 노동운동과 분신, 그리고 오늘의 촛불집회까지.
그의 처지도 그렇지만 세상도 그리 달라지지 않았다. 지금도 그가 일하는 공장은 CCTV로 노동자를 감시하고, 위생 규칙을 지키지 않고, 불법 체류자를 고용해 갈취한다. 국정원은 과거처럼 간첩단 사건을 조작하려 하고 소설을 통해 억압적 노동현실을 고발해온 그는 여기에 말려들 위기에 놓이는데….
‘나를 쓰자, 라는 생각이 번뜩 스쳤다. 하태산이 살아온 세월도 내가 살아온 세월이고…’(79쪽)
하태산의 일대기를 쓰려던 그가 신산했던 자신의 삶을 소설화하기로 하면서 스토리는 더욱 큰 울림을 갖게 된다. 특히 소설 후반부에 묘사된 현재의 모습은 넘어져도 넘어져도 다시 일어서는 노동자의 힘을 보여주는 것이어서 희망의 메시지를 던진다.
소설 후반부, 식품 공장에서 발생한 불평등한 임금문제에 일흔을 앞둔 ‘왕언니’가 1인 시위를 한다. ‘사장님이 인간이듯 나도 인간입니다.’ 눈치를 보며 머뭇거리던 동료들이 왕언니가 박스 조각에 꾹꾹 눌러쓴 문구에 감동해 하나둘 가세하면서 소설은 클라이맥스로 치닫는다. 소설의 핍진성은 자전적 요소가 가미됐기에 가능한 일이다. 작가는 오랫동안 노동문화운동을 했고, 박영진 열사 추모 사업회에서 일했다.
손영옥 선임기자 yosohn@kmib.co.kr
[책과 길] 노래가 찾아준 노동자 소설가 이야기
입력 2017-03-09 17: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