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은 한국 야구역사에서 최악의 참사로 기록됐다. ‘도하 참사’로 불리는 2006년 도하아시안게임 때도 동메달을 땄고, 2013년 제3회 WBC 때도 1라운드에서 탈락했지만 2승1패를 거뒀다. 하지만 이번 대회는 안방에서 치렀음에도 2연패로 1라운드에서 탈락하는 수모를 겪었다. 본보는 한국야구가 추락하게 된 원인과 앞으로의 발전 방향 등을 알아보는 자리를 3회에 걸쳐 마련했다.
야구인들은 8일 “고척돔 참사는 언젠가는 일어날 일”이라고 입을 모았다. 그동안 몇몇 국제경기에서의 호성적이 착시현상이 됐을 뿐 한국야구는 이미 추락의 방향으로 가고 있었다는 것이다. 특히 세대교체 실패와 KBO리그의 하향평준화는 두고두고 한국야구의 발목을 잡을 공산이 크다. 병역 면제에만 관심을 갖는 대표팀의 기강해이도 경쟁력을 갉아먹는 요소가 됐다.
질 떨어진 KBO리그와 몸값 거품
지난해까지 막내구단 kt 위즈를 이끌었던 조범현 전 감독은 “2군에서 뛰어야할 선수가 1군 경기에 나오고 있다”고 한탄했다. 2010년 이후 프로야구 인기가 크게 올라가자 한국야구위원회(KBO)는 무리하게 8개 구단을 10개 구단으로 만들었다. 아마야구가 활성화되지 않은 상황에서 구단 확대는 무리였다는 비판이 나왔다. KBO에 따르면 지난해 말 기준으로 한국 고교 야구팀은 71개다. 반면 일본은 약 60배 많은 7000여개가 있다. 신생구단은 선수 공급에 애를 먹고, 기존 구단은 좋은 선수를 신생구단에 내주며 하향 평준화가 이뤄졌다.
여기에 KBO가 야구 흥행을 위해 인위적으로 좁힌 스트라이크존은 치명적인 부작용을 낳고 있다. KBO는 2000년대 초반 타저투고(打低投高) 현상이 지속되자 스트라이크존을 좁혔다. 타자들은 자기가 노리는 공을 쉽게 칠 수 있게 돼 실력이 정체됐다. 지난해 프로야구에선 3할 타자가 무려 40명이나 되는 기현상이 나타났다. 타고투저가 심화되면서 타자들은 자신의 기량이 향상됐다는 착각에 빠졌다. 이들은 자유계약선수(FA)가 되면 몸값 부풀리기에 여념이 없었다. 하지만 이런 ‘신기루’는 이번 WBC에서 완벽히 깨졌다.
세대교체 실패
이번 대회에서 한국 대표팀 엔트리 28명 중 국제대회에 경험이 있는 선수만 무려 20명이나 됐다. 김태균은 2000년 시드니올림픽 이후 17년째, 이대호는 2006 도하아시안게임 이후 11년째 태극마크를 달았다.
김태균과 이대호는 이미 30대 중반에 접어들었다. 임창용은 불혹을 넘겼다. 경험 많은 선수가 출전하는 것은 당장의 성적에는 좋을지 몰라도 젊은 선수들의 성장을 더디게 해 미래 경쟁력 저하를 갖고 오게 된다. 반면 네덜란드는 28명 중 18명이 20대의 새로운 기대주로 채워졌다.
일본 매체 스포니치아넥스는 “세대교체가 진행되지 않았다. 30대 중반의 중심타선 두 명이 침묵해 한국은 두 경기에서 1득점에 그쳤다”고 비판했다. 노장 위주의 잇단 대표팀 구성은 결국 고인 물이 되고 말았다. 김인식 대표팀 감독은 “이전 대회 때보다 지금은 투타 실력이 다 떨어진다. 수비도 마찬가지”라고 고백했다.
태극기 의미 모른 기강해이
지난 8일 네덜란드와의 경기에 앞서 가진 국민의례에서 김태균은 장난기 어린 표정으로 거수 경례를 했다. 0-5로 뒤지던 8회초 1사 1루. 김태균이 병살타로 물러나자 더그아웃에 있던 오재원과 김하성은 웃으며 잡담을 나눴다. 패색이 짙던 9회초 박석민의 마지막 타석 때 모두가 숙연해져 있을 때 주장 김재호는 홀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이는 태극기의 무게를 망각한 대표팀의 현주소를 극명하게 보여준 장면이다.
선수들은 대표팀에 선발됐을 때 하나같이 “태극기의 무게감을 느낀다”고 했다. 하지만 이는 구두선에 불과하다. 지난달 대표팀이 일본 오키나와로 전지훈련을 떠났을 때 현지에서 만난 한 고참 투수는 “내가 왜 뽑혔는지 모르겠다”고 투덜거렸다.
프로야구 선수들은 국제대회 참가를 ‘가욋일’로 여기고 있다. 이번 대회를 앞두고 대표팀 코칭스태프는 선수 구성에 애를 먹었다. 강정호(피츠버그)의 음주사고 등 여러 가지 일들이 있었지만 일부 선수들은 몸 상태를 이유로 빠졌다. 프로야구 선수들은 겨우내 몸을 만들어 프로야구가 개막되는 3월 말에 100%의 몸 컨디션을 찾는다. 따라서 대표팀에 차출되면 부상과 오버 페이스가 진행되는 것을 우려하는 구단에선 선수 차출에 상당한 거부감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이는 다른 나라도 마찬가지란 점에서 부진의 변명이 되지 않는 이유다.
반면 병역 면제라는 ‘당근’이 걸린 경기 참가에는 사활을 건다. 2014년 인천아시안게임 때는 나지완이 부상을 숨기고 대표팀에 들어왔다고 큰 비난을 받은 게 대표적인 예다. 한 구단 관계자는 “결과적으로 선수들의 해이해진 정신상태가 참사의 불씨가 됐다”고 말했다.
모규엽 기자 hirte@kmib.co.kr
[‘고척 참사’ 한국야구] (상) ‘거품’에 날아간 ‘투혼’
입력 2017-03-09 05: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