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길] 경성공전, 한국 근대건축 터 닦다

입력 2017-03-09 17:19 수정 2017-03-09 21:34
일제강점기에 지어진 건축물에는 우리나라 건축 1세대들의 철학이 깃들어 있다. 사진은 한국의 근대 건축사를 대표하는 건물들. 왼쪽 사진부터 시계방향으로 이화여대 본관, 화신백화점, 이화여대 중강당. 루아크 제공
일제강점기의 근대 건축물에는 조선인들의 이상과 현실, 이성과 감성의 불협화음이 녹아 있다. 암울한 시대에서 조선인 건축가들은 어떤 삶을 살았고 어떤 건축물을 만들었을까. 저자는 이런 의문을 해결하기 위해 건축가들의 인생과 그들의 유산을 탐구하기 시작했다.

그 시대의 건축가들을 이해하려면 1916년 일제가 설립한 경성공업전문학교(경성고등공업학교 전신)를 빼놓을 수 없다. 근대 건축사에서 큰 발자취를 남긴 박길룡(1898∼1943) 박동진(1899∼1980) 등을 배출한 학교이기 때문이다.

건축 관련 학교가 여럿 있었지만 경성공업전문학교 출신 건축가들이 가장 활발한 건축 활동을 펼쳤다. 건축은 배를 곯지 않는 직업이었고, 기술자 수첩이 있으면 징용도 피할 수 있었다.

박길룡은 조선인 ‘최초’라는 타이틀을 달고 다닌 건축가였다. 조선인 최초로 경성공업전문학교를 졸업했고, 조선총독부 건축기사가 됐으며, 건축사무소를 개업했다. 친일파뿐 아니라 사회주의자나 민족주의자도 그에게 건축 설계를 맡겼다. 그는 마흔여섯에 뇌출혈로 세상을 떠나기까지 조선생명보험사옥, 화신백화점, 경성여자상업학교 등 숱한 건축물을 남겼다. 화신백화점은 경성 인구의 80%가 구경할 만큼 장안의 최신식 명물로 꼽혔다. 박길룡건축사무소는 그만의 일터가 아니라 조선 건축가들이 응집하던 근거지 역할을 했다.

동갑내기인 박동진과 강윤(1899∼1975)은 3·1운동에 가담해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만주와 시베리아를 떠돌다 귀국한 박동진은 경성고등공업학교에 재입학했다. 김성수(1891∼1955)의 안정적인 후원을 받은 박동진은 고딕 양식과 학교 건축에서 차별성을 보였다. 보성전문학교(고려대) 본관·서관·도서관·신관 등을 설계했다.

강윤은 유관순 열사의 오빠인 유우석과 독립만세운동을 벌였다. 수감생활을 마치고 출소한 강윤은 일본에서 건축사무소를 운영하는 미국인 선교사 윌리엄 보리스의 도움을 받아 일본으로 건너갔다. 간사이공학전수학교(현 오사카공업대학) 건축과를 졸업한 강윤은 보리스건축사무소의 핵심 인물로 성장했다. 보리스건축사무소는 이화여전(이화여대), 태화사회관, 세브란스병원, 철원제일교회 등 수많은 건물을 완공했다.

난해한 작품을 많이 발표한 시인 겸 소설가인 이상(1910∼1937·본명 김해경)은 백부의 강요에 따라 경성고등공업학교 건축과에 입학했다. 이상은 “백부가 그림을 그리면 굶어죽기 딱 좋다면서 차라리 건축을 하라고 했다”면서 “날 키워준 백부를 배신할 수 없었다”고 회상했다. 건축과를 수석으로 졸업한 이상은 건축 일을 하면서도 그림을 그리고 시와 소설을 썼다. 1933년 건축계를 떠나 1937년 일본 도쿄에서 사망할 때까지 이상의 4년간 삶은 일탈과 기행으로 파란만장했다.

대한민국 건축 1세대들의 삶과 건축물을 들여다볼 수 있다는 점에서 이 책은 건축역사 문외한들에게 길잡이 역할을 할 수 있다. 이 책을 보면서 화사한 봄날에 경성의 옛 건축물을 찾아 여행을 떠나면 어떨까. 10명 이상의 건축가들을 다룬 탓에 깊이가 부족한 점은 옥에 티다.

저자는 “독립투사가 아닌 한, 투철한 신념이나 의식을 가지지 않는 한, 친일과 저항(항일) 사이의 회색지대에서 살았던 사람들처럼 그 시대의 건축가도 타협과 저항, 동경과 콤플렉스 사이에서 갈등하고 싸우고 변화하고 좌절했다”고 평가한다.

염성덕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sdyu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