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시각-정승훈] 지켜보는 사람이 바꾼다

입력 2017-03-08 18:00

8일 오전 회사 사무실의 자리에 앉자마자 눈길을 잡아끈 뉴스가 있었다. 중학교 3학년 여학생 2명이 험담을 하고 다녔다는 이유로 한 학년 아래 여중생을 폭행했다는 내용이었다. TV 화면에는 교복 입은 피해 학생이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데 가해 학생들이 폭행하는 모습이 비쳤다. 가해자들의 일행 중 한 명은 휴대전화로 이 모습을 촬영해 영상을 퍼뜨렸다. 아동·청소년 심리 전문가 상당수는 학교폭력을 해결하기 위해선 주변에서 지켜보는 다수의 아이들, 즉 ‘방관자’들의 태도가 중요하다고 지적한다. 학교 안팎, 교사와 부모의 사각지대에서 교묘하게 일어나는 폭력을 막을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주체는 피해자나 가해자가 아니라 이런 상황을 지켜보는 아이들이라는 것이다.

가해자들은 피해자를 놀리거나 폭행을 가할 때 주변 친구들의 반응을 살피는 경우가 많다. 지켜보는 이들이 가해자의 행동에 관심을 갖고 호응해주는 듯한 태도를 보이면 이러한 행동은 더욱 강화되는 경향이 있다. 반면 주변 친구들의 태도가 가해자의 행동에 부정적일 땐 가해 행동이 현저히 줄어든다고 한다. 가해자의 행동을 소극적으로라도 말리거나 최소한 눈살을 찌푸리는 등의 표정만 보여도 가해 행동이 최소화될 수 있다는 것이다.

소아청소년 정신과 전문의로 매주 목요일 국민일보에 온라인 칼럼 ‘아이들 세상’을 게재하는 이호분 원장의 지적은 의미심장하다. 그는 “가해자의 행동에 적극적으로 맞설 수 있다면 좋겠지만 굳이 나서서 맞서지 않더라도 ‘폭력은 나빠, 약한 친구의 마음을 이해해’라는 생각을 표정이나 태도로만 드러내도 학교폭력은 꽤 막을 수 있다”고 했다.

타인의 폭력을 용인하거나 미화하지 않는 태도를 아이들에게 가르치는 게 중요하다는 지적이다. 단지 아이들 사이에만 해당되는 내용은 아니다. 어른들의 일상이나 정치에서도 마찬가지다. 상황이 발생했을 때 이해 당사자가 아닌 것처럼 보이는 이들이 어떤 태도를 보이느냐가 향후 흐름을 좌우하기 마련이다.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은 퇴임하면서 “민주주의를 지키려면 시민들이 공동체 의식을 회복해야 한다”고 했다. 고(故) 노무현 전 대통령도 퇴임 후 내놨던 메시지에서 “민주주의 최후 보루는 깨어 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이라고 강조했다. 모든 사람이 다 정치 전면에 나설 수 없고, 그럴 필요도 없다.

하지만 현실을 냉철하게 지켜보는 시민들이 없으면 민주주의는 위기를 맞는다. 민주주의 발전에 가장 중요한 순간을 만들어낸 건 현실을 오랫동안 지켜보고 있던 시민의 힘이었다. 1987년 6월항쟁 당시 직선제 개헌을 이끌어낸 것도 넥타이부대로 통칭되는 직장인들의 태도 변화가 결정적이었다. 대학생들과 재야 단체가 주도하는 시위를 사무실 창을 통해 지켜보던 직장인들이 어느 순간 시위대 뒤에서 힘을 보태면서 서슬퍼런 군사정권은 결국 무릎을 꿇었다.

국정농단 사건에 대한 분노도 비슷하다. 오래전부터 정치권 일각에서 국정농단을 우려하는 주장이 나왔지만 결국 변화를 이끌어낸 힘은 지켜보고 있던 국민들의 목소리였다. 국회가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안을 통과시키도록 이끈 힘도 이것이었다. 국민들이 권력자들의 잘못에 침묵하고, 그들의 거짓된 행동을 계속 외면하기만 했다면 변화는커녕 국정농단은 더 심해졌을 것이다.

오랫동안 이어져 왔던 박근혜 대통령 탄핵심판의 결론이 곧 헌법재판소에서 내려질 것으로 보인다. 인용 또는 기각 등 어떻게 결론이 나든 중요한 것은 국민들이 권력의 곁에서 지켜보는 감시자의 태도를 잃지 않아야 한다는 점이다. 2017년 3월, 오늘도 우리는 지켜보고 있다.

정승훈 온라인뉴스부장 shju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