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 통영 사량도, 바다 건너 달려온 봄바람에 내 마음도출렁

입력 2017-03-09 00:02
이른 아침 경남 통영시 사량도 가마봉 인근 출렁다리에서 본 옥녀봉과 사량대교가 그림같은 풍광을 연출하고 있다.
사량도 지리산 정상을 찾은 등산객이 육지의 지리산 천왕봉을 보고 있다. 흰 연기 나는 삼천포화력발전소 오른쪽 뒤로 천왕봉이 희미하게 보인다.
사량도 하도의 푸른 보리밭 너머로 본 지리산 종주 능선의 출렁다리. 작은 사진은 보리밭 옆에 앙증맞게 고개를 내민 큰개불알풀꽃.
통영 가오치항
파란 하늘 아래 코발트빛 바다와 파릇한 마늘밭, 꽃망울을 터뜨리는 봄꽃, 새싹을 키우는 보리…. 바다를 건넌 봄바람이, 남녘 섬마을에 내려앉은 따스한 봄볕이 마음을 잡아끈다. 가만히 기다리면 찾아오는 봄이지만 무엇이 그리 급한지 남쪽으로 성급한 봄마중을 나섰다.

경남 통영시의 가장 서쪽 해역에 있는 사량도는 3개 유인도와 6개의 무인도로 이뤄져 있다. 상도와 하도 사이에 흐르는 폭 1.5㎞의 물길이 가늘고 긴 뱀처럼 구불구불한 형세를 보여 뱀 사(蛇)에 해협을 뜻하는 들보 량(粱)을 사용해 사량도라는 이름을 얻었다는 설이 유력하다.

태풍에도 안전한 정박 여건과 영남과 호남을 잇는 수로에 위치해 고려 때부터 수군이 주둔했다. 고려 말에는 왜구를 막고자 최영 장군이,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이 머무른 흔적과 기록도 남아 있다. ‘난중일기’에 사량이 14회 이상 나온다. 사량도의 옛 이름은 ‘박도’였지만 조선 초기 바뀌었다.

사량도의 가장 큰 매력은 지리산과 옥녀봉을 오르는데 있다. 가장 인기있는 산행코스는 돈지항-지리산-불모산-가마봉-옥녀봉-금평항으로 이어지는 8㎞ 종주 코스로 4시간 남짓 소요된다. 항구 앞 마을버스는 15분 만에 산행의 시작점인 돈지마을에 내려 준다.

마을 뒤쪽으로 근육질 암반으로 형성된 지리산이 병풍처럼 서 있다. 칠부 능선에 올라서면 발아래 다랑논이 물결처럼 펼쳐진다. 땅 한 평 얻으려는 섬사람들의 고단한 삶이 묻어난다. 다람쥐 모양의 농개도, 철새처럼 입을 쭉 내민 죽도, 멀리 남해섬이 아른거리며 삼천포대교까지 눈에 들어온다. 돈지항은 물 위의 연꽃처럼 아름답다.

암반에 뿌리를 내린 소나무와 들꽃에 눈길을 주며 발밑 바다경치에 취하다 보면 어느새 지리산(지리망산) 정상(397.8m)이다. 섬 중앙에 더 높은 달바위봉(불모산·400m)이 있지만 지리산은 이를 제치고 사량도 대표 산의 지위를 차지했다. 이곳에서는 동서남북의 사방의 남해바다가 눈 아래 펼쳐진다.

바다 건너 공룡발자국이 있는 상족암이 손에 잡힐 듯 가까이 보이고 삼천포화력발전소 오른쪽으로 멀리 머리에 잔설을 이고 있는 지리산 천왕봉도 아스라이 조망된다. 그야말로 일망무제다. 바로 옆에는 동백으로 유명한 소를 닮은 수우도가 쪽빛 바다 위에 떠 있다. 보석처럼 점점이 박힌 섬들은 육지로 연결된 징검다리 같다. ‘한국 100대 명산’ ‘통영 8경’ ‘매년 40만명이 찾는 섬’ 등의 수식어가 괜히 붙은 것이 아니다.

달바위까지는 암반과 해송숲이 경쟁하듯 등장하며, 촛대바위와 남근바위가 하늘을 향해 있다. 공룡의 등뼈 같은 칼날바위를 지나면 사량도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인 달바위가 기차처럼 길게 이어졌으며 노송 한 그루가 암반 틈에 간신히 뿌리내리고 있다. 이 바위 아래 동굴 속의 둥근 바위가 달처럼 생겨서 달바위로 불렸다고 한다.

사량도 산행의 하이라이트는 달바위-가마봉(303m)-옥녀봉(281m)으로 이어지는 암반 능선길이다. 낙타의 등 같은 세 개의 봉우리를 연속적으로 타고 넘으며 펼쳐지는 한려해상의 풍광은 사량도가 아니면 보기 힘든 절경이다. 향봉과 연지봉에 두 개의 출렁다리가 놓이기 전만 해도 난코스였다. 밧줄을 타고 오르내리거나 직벽에 세워진 계단을 오금이 저리게 다녀야 했다. 출렁다리가 설치되면서 짜릿한 재미는 덜 하지만 출렁다리 위에서 내려다보면 고도감에서 오는 아찔함이 만만치 않다. 철계단이나 출렁다리가 무서워도 걱정할 필요는 없다. 위험한 코스를 슬며시 돌아갈 수 있도록 우회길이 마련돼 있다. 출렁다리를 건너면 동쪽으로 푸릇푸릇한 다랑논과 옥동마을 그리고 상도와 하도를 잇는 연도교가 한눈에 들어온다.

사량도 등산의 마지막 봉우리인 옥녀봉에 올라 지나온 산과 능선을 바라다보고 하산할 대항마을을 내려다본다. 백사장이 길게 펼쳐져 있는데, 사량도에서 유일한 대항해수욕장이다. 여름철에는 인산인해를 이룬다고 한다. 호수처럼 잔잔한 바다 건너로 하도의 칠현산(349m) 7봉우리가 눈앞에 다가서 있다.

옥녀봉에는 애절한 전설이 얽혀 있다. 태어나자마자 부모를 여읜 옥녀는 이웃 홀아비의 보살핌으로 자란다. 옥녀가 어여쁜 처녀로 성장하자 의붓아버지 눈에는 여인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그는 욕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옥녀의 방으로 뛰어들었다. 옥녀는 뒷날 새벽 상복에 멍석을 쓰고 송아지 울음소리를 내면서 기어서 산에 올라오면 요구를 들어주겠다고 말했다. 설마 그럴까 싶어 한 얘기였지만 의붓아버지는 그대로 행했다. 이에 절망한 옥녀는 천륜을 지키고자 천 길 낭떠러지에서 몸을 던진다.

옥녀봉 밑에는 사철 붉은 이끼가 끼어있다고 한다. 사람들은 이것을 옥녀의 피라고 믿는다. 요즘도 결혼식 때면 옥녀봉이 보이는 곳에서는 신랑 신부가 맞절을 하지 않는 풍습이 있다. 결혼한 신부가가마를 타고 가다가도 옥녀봉 아래를 지날 때는 걸어서 간다고 한다.

산행이 부담스럽다면 금평항-옥동-돈지-내지-대항-금평항 해안선을 그리며 섬 한 바퀴를 트레킹해도 좋다. 총 17㎞를 걸어서 3시간가량 걸린다. 특히 돈지에서 내지까지 해안길이 절묘하다. 죽도, 농개도, 두미도를 내려다보는 해안길이다. 시야가 트인 곳에는 바다전망대가 서 있어 쉬었다 가기에 그만이다.

승용차로 섬 일주를 하겠다면 30분이면 족하지만 절경에 발목이 잡혀 차를 세우다보면 한 시간도 모자랄 지경이다. 금평항 마을 안쪽에는 고려말 왜구를 무찌른 최영 장군 사당이 있다. 250년 된 팽나무 가지가 사당을 감싸고 있으며 하얀 교회건물과 공존하며 살아가고 있다. 마을 고샅길을 어슬렁거리며 한가로운 어촌의 풍경을 가슴에 쓸어 담아도 좋다. 봄이 찾아든 해변에는 싹을 키운 보리와 봉오리를 터뜨린 매화, 앙증맞게 피어 있는 큰개불알풀꽃(봄까치꽃) 등 봄꽃들이 봄소식을 전한다.


■ 여행메모

가오치항에서 배로 40분가량 소요

연도교 통해 상도·하도 일주 가능



사량도행 배는 통영 가오치항(사진), 사천 삼천포항, 고성 용암포항에서 출발한다. 수도권에서 가오치항으로 가려면 통영대전고속도로 고성나들목에서 나와 통영 방면으로 좌회전해 14번 국도를 타고 가다 도산삼거리에서 우회전해 77번 국도를 이용한다. 수도권 기준 5시간가량 걸린다.

가오치항에서 사량도 금평항까지는 평일엔 오전 7시부터 오후 5시까지 2시간 간격으로 6차례, 3∼10월 주말엔 1시간 간격 11차례 운항한다. 약 40분 소요된다. 사량도에서 나오는 배는 1시간씩 늦춰 적용하면 된다. 요금 편도 6000원, 승용차는 1만6500원. 사량도에서는 배가 도착하는 시간에 맞춰 마을버스가 운행된다.

사량도의 상도와 하도는 연도교로 연결돼 있어 차량으로 오갈 수 있다. 두 섬 모두 일주도로가 있어 자동차로 드라이브하거나 자전거 하이킹하면 크게 힘들이지 않고 봄향기 가득한 남해를 만끽할 수 있다.

사량도엔 항구마다 펜션과 민박이 여럿 있다. 특히 면사무소가 있는 금평항에 몰려 있다. 횟집·식당 등을 겸하는 곳도 많아 숙식을 한 번에 해결할 수 있는 것도 장점이다. 사량도에서 가장 큰 숙소였던 사량섬유스호스텔은 영업을 중지한 지 오래됐다.


사량도(통영)=글·사진 남호철 여행선임기자 hcna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