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를 돌아보니 197㎝짜리 거구가 서 있었다. 하도 어이가 없어서 멍하니 있는데 이번엔 192㎝짜리 거구가 달려와 내 몸을 밀쳤다. 2m 정도는 나가떨어진 것 같다. “브라보!” 이 장면을 지켜보던 10여명의 선수들이 박수를 치며 키득거렸다. 화가 끝까지 치밀어 올랐다.
“내 고마 야구 때려 치아뿐다.” 한국에서 사실상 방출되다시피 해서 미국에 왔는데, 이런 수모까지 당하니 야구를 하고 싶은 생각이 뚝 떨어졌다. 먼지를 툭툭 털면서 일어나는데 하나님의 미세한 음성이 들렸다. ‘만수야, 절대 포기하지 마라. 힘을 내라.’ ‘주님, 아픈 아내를 한국에 두고 왔는데 제가 이걸 꼭 해야 합니까.’ ‘그래.’ 눈물이 핑 돌았다.
나중에 알고 보니 거구의 선수들이 이상한 행동을 보인 것은 나와 친해지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한국과 달리 미국은 감독과 선수가 농담도 하고 스킨십을 하는 등 스스럼없이 지낸다. 그런데 아시아에서 온 키 작은 코치가 농담 한마디 않고 근엄한 표정을 지으니 가까이 하고 싶었던 것이다.
미국 클리블랜드 인디언스 마이너리그 싱글 A팀 3루 작전코치 생활은 그렇게 시작됐다. 영어를 잘 못하니 할 수 있는 말이라곤 ‘렛츠 고(Let’s go)’ 정도였다. 경기가 시작됐는데 5회까지 우리 팀과 상대팀의 스코어가 0대 0이었다. 지루함이 느껴졌다. 150여명의 관중은 하품을 하고 있었다.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야 임마, 이렇게 치라고. 쳐!” “이 자슥아, 더 세게 못 쳐.” 어차피 관중 가운데 한국말을 알아들을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고래고래 소리를 쳤다. “그래, 그거야. 화끈하게 하자고.” 야구장은 내 목소리로 쩌렁쩌렁 울렸다. 타석에 선 선수에게 배트를 휘두르고 뛰는 모습을 보여줬다. 관중의 눈은 투수나 타자가 아닌 내게 쏠렸다.
7회가 시작됐다. 주심이 저벅저벅 다가왔다. “와? 니는 또 와 카는데.” “겟 아웃 오브 히어(Get out of here).” 운동장에서 나가라는 뜻이었다. 대충 들어보니 코치로서 제정신이 아닌 행동을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음식도 안 맞고 언어도 안 되는데 그런 얘기까지 들으니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래, 자슥아 내 간다. 나가면 되지. 근데 내가 뭘 잘못했다고 그러는 기고. 응?” 무료하던 관중들은 볼거리가 생겼는지 배꼽을 잡고 웃었다. 동양에서 온 키 작은 코치가 펄쩍펄쩍 뒤면서 한국말로 외치니 그 모습이 우스꽝스러웠던 모양이다. 관중석의 웃음소리가 조소처럼 느껴졌다.
우리 팀의 마코 감독이 뛰어왔다. “만수, 장난이었다. 2회만 더 코치해 달라.” “뭐라꼬? 내를 두고 장난을 쳤다고. 이 자슥들이.” 경기를 끝내고 호텔에 들어와 짐부터 쌌다.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 부친이 돌아가셨을 때도 그만큼 울지는 않았다. 샤워기를 틀어놓고 1시간 넘게 엉엉 울었다.
“주님, 이게 하나님의 뜻 맞습니까.” 그렇게 하나님을 원망하며 우는데 깊은 내면에서 출애굽기 14장 10∼14절 말씀이 떠올랐다. 홍해에 가로막힌 이스라엘 민족이 바로의 공격 앞에 놓인 절체절명의 장면이다. 그 상황에서 모세는 이렇게 말한다.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실 것이다. 너희는 가만히 있어라.”
짐 보따리를 풀고 이튿날 운동장으로 나갔다.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와 같은 기분이었다. 죽기보다 싫을 정도로 자존심이 상했지만 주님의 말씀을 생각하며 억지로 발걸음을 옮겼다.
벤치룸이 시끌벅적했다. 클리블랜드 인디언스팀 제너럴매니저인 데이브가 와 있었다. 한국으로 따지면 단장과 같은 개념이었다. 데이브가 나를 호출했다. “당신이 리입니까?” “그렇습니다만.” 정리=백상현 기자 100sh@kmib.co.kr
[역경의 열매] 이만수 <8> 모멸감 느낀 美 코치생활 눈물로 시작
입력 2017-03-08 0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