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자의 도덕경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선한 자에게 나는 선으로 대하고, 선하지 않은 자에게도 나는 선으로 대하니, 선이 이루어진다.” 선한 자뿐 아니라 선하지 않은 자에게도 선으로 대할 때 선은 비로소 이뤄진다는 게 세상의 이치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선은 늘 제한적입니다. 사랑함과 용서함 없이 나의 기준과 가치로 그 사람을 판단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우리를 돌이켜봐야 합니다.
본문은 특별히 산상수훈 중에서도 원수를 대하는 태도에 관해 예수님의 새로운 해석을 들려줍니다. 오른편 뺨을 친다는 것은 오른손을 주로 사용하는 유대인들의 관습에서 보면, 마주보고 있는 상대에게 손등으로 뺨을 친다는 것을 뜻합니다. 당시에 손바닥이 아니라 손등으로 때린다는 것은 아주 심한 수치와 모멸감을 상대에게 주는 행위를 나타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런 악한 인간에게 왼뺨마저도 돌려대라고 요구합니다.
유대인들에게 겉옷은 일교차가 심한 밤에 몸을 보호하는 유일한 보호막이었습니다. 때문에 ‘가난한 사람의 겉옷을 전당 잡을 수 없다’고 율법으로 규정해 놓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지금 적대자 앞에서 이 권리조차 포기할 것을 요구합니다. 과연 우리 중 몇 명이나 이런 양보와 수치를 감당할 수 있을까요.
예수님은 개인이 원수에게 보복하는 것을 철저히 금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어리석게도 눈에는 눈으로 갚지 않고 더 큰 보복으로 갚을 때가 있기 때문입니다.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롬 12:19)
원수 갚지 않는 일은 행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길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은 여기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원수를 갚지 말고 나아가 그를 용서하고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사실 이것은 내가 결심했다고 지킬 수 있는 쉬운 일이 결코 아닙니다. 그러기에 영국의 신학자 스티븐 체리는 “용서는 아름다운 일이 결코 아니다. 옆구리에 깊숙이 박힌 창을 내 손으로 뽑아내는 것처럼 고통스러운 것이 용서”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힘들고 어려운 길을 가야만 합니다. 그리고 그 길을 가기 위해 한 가지 나침판이 우리에게 제시됐는데 그것이 바로 기도입니다. 그를 위해 기도한다는 것은 이미 용서를 넘어서는 차원 높은 사랑의 표현입니다.
초대교회 순교자 스데반 집사도 돌에 맞아 죽어가면서 자신에게 돌을 던지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겟세마네동산에서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도록 기도하셨고, 그 기도의 결과로서 아버지께서 원하는 그 십자가의 길을 가셨습니다. 그 길을 가는 동안 뺨을 맞는 수치를 당하셨고 겉옷과 속옷까지 뺏기는 모욕을 당했지만 예수님은 스스로 그 길을 걸으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의 고통 속에서도 용서를 구하는 강도에게 용서를 베풀어주셨습니다. 힘든 일이지만 우리는 그 길을 가기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면 성령께서 우리와 함께하셔서 그 길을 가게 하실 것입니다.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실 것입니다. 아멘.
김선명 목사(인천 평화루터교회)
[오늘의 설교] 원수를 사랑하는 십자가의 길
입력 2017-03-08 0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