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밀출국→ 밀입국 6년… ‘법망’ 벗어난 이 사채업자

입력 2017-03-07 05:00

바지선인 명진10001호 냉각수 탱크 쪽에 숨어 있던 대부업체 B사 대표 민모(54)씨가 거제 고현항에 내린 건 지난해 3월 6일이다. 20억원 넘는 조세포탈 등 여러 혐의와 함께 해외도피 생활을 이어가던 민씨의 밀입국 정보는 우리 수사 당국에 포착됐다. 밀입국 1년 만인 현재 그는 자유의 몸이다.

민씨는 2009년 5월 미국으로 출국했다. 추후 사기적 부정거래 범행으로 판명된 코스닥 상장사 C사의 유상증자에 관여한 이후였다. 그는 2011년 5월 미국 로스앤젤레스(LA)에서 여권을 분실해 재발급 신청을 했는데, “형사재판 계류 중으로 재발급되지 않는다”는 통보를 받았다. 그는 현지에서 위조업자를 통해 ‘25 JAN 2012(2012년 1월 25일)’로 기재된 여권 유효기간을 ‘25 JAN 2017(2017년 1월 25일)’로 고쳤다. 민씨는 이 여권으로 2011년 7월 LA 공항을 빠져나갔다. 변조된 여권은 그다음 달 홍콩 공항, 마카오 항구, 상하이 푸둥 공항 등에서도 제시됐다. 결국 민씨는 중국 공안에 여권 변조가 적발돼 2011년 7월 23일 국내로 추방됐다.

민씨는 국내로 송환된 뒤에도 수사 당국의 출국금지를 뚫고 재차 해외로 나갔다. 민씨는 2011년 9월 자신의 운전기사 이모(48)씨에게 “내가 출국금지돼 있고 여권변조 혐의 등으로 수사 중이다. 내 사진과 당신 사진을 합성해 당신 명의로 여권을 발급받아 달라”고 부탁했다. 서울 강남구청은 2011년 10월 합성사진을 기재한 새 여권을 이씨 명의로 발급했다. 민씨는 이 여권으로 인천공항 출국심사를 통과하고 말레이시아로 떠났다.

한국을 떠나려 애쓰던 그는 지난해 1월이 되자 다시 한국으로 돌아오려 중국 웨이하이시에서 밀항 브로커를 찾았다. 선원 이모(51)씨를 소개받은 뒤 5000만원어치 밀항을 제안했고, 그의 아들 계좌로 착수금 2000만원을 보냈다. 명진10001호는 지난해 2월 27일 중국 닝보항 앞에 정박했다. 민씨가 소형 선박으로 접근해 승선했다. 이씨의 부탁을 받은 다른 선원이 냉각수 탱크 쪽에 숨은 민씨에게 식사를 갖다 줬다.

민씨는 지난해 3월 6일 새벽 명진10001호에서 내린 뒤 나머지 3000만원을 이씨에게 건넸다. 합성사진 여권으로 밀출국한 지 4년여 만의 밀입국이었다. 하지만 해외에도 망원(網員)을 두고 있던 남해해경을 완전히 따돌릴 수는 없었다. 잠복 중이던 해경이 4일 뒤 서울에서 민씨를 검거했다. 민씨는 이미 수사기관으로부터 3건의 지명통보가 이뤄져 있던 수배자였다.

해경과 부산지검은 민씨를 상대로 출입국관리법위반, 공문서변조, 변조공문서행사, 범인도피교사, 여권법위반, 밀항단속법위반 등 6가지 혐의를 조사했다. 민씨는 밀출국 사실을 한동안 묵비했고 배를 수색해 민씨의 DNA를 확보하려던 수사관은 바다에 떨어질 뻔했다. 5개월여 뒤 민씨에게 내려진 판결은 집행유예 3년, 사회봉사 120시간이었다. 부산지법은 민씨에게 유의미한 전과가 없는 점, 수사기관에서 범죄사실을 자백하며 반성하는 점 등을 참작했다.

이 사이 민씨에게 적용됐던 다른 혐의들은 하나둘 사라졌다. 2006년부터 2009년까지 이자소득 약 71억원을 신고·납부하지 않아 24억5000만원 상당의 종합소득세를 포탈했다는 혐의는 해외 도피 중 상당 부분의 공소시효가 지났다. 밀입국 관련 공판이 한창이던 지난해 7월 20일에는 2008년과 2009년의 세금 포탈 내용까지 공소시효가 완성됐다.

공소시효 도과를 확인한 서울중앙지검은 지난해 11월 민씨의 조세범처벌법위반 혐의를 불기소 결정했다. 수사지휘를 한 경찰의 송치 의견이 ‘혐의없음’이었다는 게 검찰의 설명이다. 민씨는 경찰에서 “미국으로 출국하며 국세청에 소득세 자진신고를 하지 못했고, 국세청에 정정신고를 할 것”이라고 진술했다고 한다. 2009년에는 번 돈보다 쓴 돈이 더 컸다고 주장했다.

부산지검은 “민씨가 별건 형사사건의 공소시효를 도과시키기 위해 해외로 밀항했고, 마치 국내에 계속 있었던 것처럼 가장하려 밀입국했다”고 공소사실을 적었다. 하지만 부산지법은 민씨가 이를 부인하고, 증거로도 명백히 입증되지 않는다며 인정하지 않았다. 대부업체 B사는 지난해 12월 5일 해산했다. 밀입국 1년 만인 그는 현재 자유의 몸이다.

이경원 황인호 기자 neosarim@kmib.co.kr, 그래픽=박동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