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만수씨, 언제까지 야구할 겁니까. 후배들 생각도 해 주셔야죠.” “예?” “이제는 노장이 되셨잖아요.” “….”
야구는 9회말 2아웃에서 시작하는 멘탈(mental) 게임이다. 야구공을 배트로 맞추거나 글러브로 잡아내야 하기 때문에 점과 점이 정확하게 만나야 한다. 조금만 잘못 생각해도 점은 빗나간다.
구단 고위층에게 그런 얘기를 듣고 나니 다리에 힘이 쭉 빠졌다. 야구 ‘헐크’로 불리다가 3시간 넘게 벤치에만 앉아있으려니 여간 고통스러운 게 아니었다.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음료수를 마시는 것뿐이었다. 젊었을 때 경기를 치르고 벤치에 돌아오면 항상 음료수가 부족했는데, 그 이유를 그제야 알게 됐다.
‘평생 야구를 했는데 이제부턴 뭐하노.’ 두려움이 엄습했다. 평생 야구선수 생활을 할 것 같았는데 닥쳐온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어느 순간 나는 방출된 야구선수에 불과했다. 정신적 충격이 컸다. 가슴 저 밑에서 쓰라린 고통이 치밀어 올라왔다.
‘국내 최초의 메이저리그 코치가 되자.’ 인생의 처절한 쓰라림은 또 다른 도전의식을 심어줬다. 사실 야구를 위해 한눈팔지 않고 달려왔지만 늘 불안했다. 통산 1449게임에 5034타석을 뛰었다. 625득점에 252개의 홈런, 861타점, 1276안타라는 기록도 세웠다. 골든글러브를 5회 수상하고 최고 타격 3회, 최고 타점 3회 수상 등의 영광도 안았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매년, 매달, 매일 불안하고 초조한 마음이 계속됐다. 기록을 지켜야 한다는 강박관념, 최고의 선수로 잘해야 한다는 압박감이 돌덩이처럼 무거웠다. ‘그래, 고마 선수생활을 내려놓자.’ 눈물이 핑 돌았다.
1997년 결단을 하고 대구 동성로 영어학원부터 등록했다. “헬로우, 마이네임 이즈 이만수. 왓츠 유어 네임?” 하루에 6시간씩 영어공부를 하려니 머리에서 쥐가 났다. 스무살 어린 친구들과 영어를 배우려니 부끄럽기도 했다. 하지만 중학교 때 북극성을 보며 품었던 미국 메이저리그 입성의 꿈을 포기할 순 없었다.
98년 초 미국 현지 에이전트를 통해 미국 클리블랜드 인디언스 프로야구팀 코치연수의 길이 열렸다. 이 팀은 미국 마이너리그 싱글 A팀이었다. 떨리는 마음으로 미국행 티켓을 끊었다. 가족을 모두 한국에 놓고 떠나려니 마음이 무척 무거웠다. 게다가 아내의 몸 상태가 좋지 않았다.
“여보, 내 걱정은 말고 당신 일만 생각해요. 미국에 가서 탁월한 야구지도자가 돼 주세요.” “그…래.” 아픈 아내의 손을 잡고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그때만큼 눈물로 기도한 때도 없었던 것 같다. ‘사랑하는 주님, 이제 새로운 세계가 열립니더. 여호수아에게 새로운 산지를 주신 것처럼 내한테도 길을 좀 열어 주이소. 주님!’
그해 3월 미국 오하이오주 클리블랜드에 도착했다. 41세의 나이에 접한 미국 야구는 확실히 달랐다. 한국에서는 ‘이만수’ 하면 다 알아줬지만 미국에선 내 이름은 고사하고 한국이 어디에 붙어 있는지도 잘 알지 못했다. “야 이 자슥아, 88올림픽을 개최한 나라라고.” “오우, 사우스 코리아∼” 미국인들은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알던 이만수는 세상이 붙여준 이름 석 자에 불과했구나. 그동안 환호하고 나를 영웅처럼 대접해주던 것은 허상이었던 거구나.’ 낯선 땅에서 자신을 돌아보니 내 실체가 무엇인지 깨닫게 됐다.
한국에선 감독과 코치가 선수들에게 하늘과 같은 존재다. 하지만 미국은 확실히 달랐다. 어느 날이었다. 근엄한 표정으로 운동장에 서 있는데, 누군가 내 뒤통수를 퍽하고 치는 게 아닌가. “아니, 어떤 놈이고!”
정리=백상현 기자 100sh@kmib.co.kr
[역경의 열매] 이만수 <7> 은퇴 후 ‘첫 한국인 메이저리그 코치’ 새 도전
입력 2017-03-07 0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