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설교] 죄인을 찾아오시는 하나님

입력 2017-03-06 00:00

기독교의 가장 큰 특징은 계시의 종교라 할 수 있습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인간을 찾아오시고 하나님의 열심으로 당신의 뜻과 계획을 설명하십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빚어진 인간은 끊임없이 하나님으로부터 도망가고 심판을 자초해 자멸의 길을 걷게 됩니다.

창세기에 등장하는 아담의 범죄, 가인의 살인 사건, 노아의 홍수, 바벨탑의 분열,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 등 모든 사건 속에서 하나님은 구원의 방도가 없는 인류에게 여전히 은혜와 사랑으로 찾아오시고 구원을 베푸십니다.

본문에도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찾아오셨습니다. 그 이유는 소돔과 고모라의 죄악이 심히 무거움을 알리시고 심판이 아닌 구원의 길을 열어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하나님의 본질은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라 사랑이십니다.

인간은 보편적으로 신을 두려워합니다. 이는 인간 스스로가 상상 속에 지어내고 만들어낸 신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요청적 유신론’이라 부릅니다. 이 요청적 유신론은 신이 존재하도록 인간이 요청하고 있습니다. 만일 신이 없다면 인간이 신을 만들어서라도 있게 해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렇게 인간의 상상 속에 만들어진 신은 두렵지만 노하지 않게 잘 구슬리고 달래서 인간이 원하는 신적 존재가 됩니다. 주로 복을 내리는 신으로 변하게 됩니다. 신화 속을 보십시오. 신화에 등장하는 신들의 능력은 출중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온전한 인격을 갖지 못한 신으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의 존재는 완전히 다릅니다. 하나님의 속성은 사랑과 화평, 온유와 자비, 오래 참음으로 충만합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를 사랑으로 질투하시는 지정의(知情意)를 소유하신 인격체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실패와 실수에 대해 윽박지르거나 다그치시며 몰아붙이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또 그에 상응하는 벌을 내리시기를 기뻐하는 편협한 하나님도 아닙니다.

이런 사실은 본문의 하나님과 아브라함의 대화 내용 속에서 볼 수 있습니다. 대화에는 일방적이고 강압적이며 공포스러운 분위기를 발견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두려움 속에서도 설득하시고 설명하시며 타협도 합니다. 마치 부모와 자녀가 대화하듯 인격과 인격 사이의 애정과 신뢰를 보여줍니다.

의인 50명에서 45, 40, 30, 20, 10명까지 내려갑니다. 인간은 정의를 구현해야 한다는 명분으로 정죄하며 심판을 원하지만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은 어떻게 해서든지 구원시키자는 쪽이십니다. 이것이 인간을 향한 하나님 사랑의 방식이요 이 땅에 그의 아들을 보내신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성도 여러분, 오늘도 우리들의 죄와 못남으로 인해 실패와 낙심, 좌절을 경험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두려운 심판주로 찾아오지 않으시고 우리가 침 삼킬 틈 없이 용서와 사랑과 격려와 위로, 은혜로 우리 마음을 두드리시며 우리 안에 임하십니다. 그리고 마침내 우리의 입술에서 신령한 노래와 영광을 받아내십니다. 하나님은 광대하신 분이십니다. 그의 말로 다할 수 없는 사랑 앞에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됐다는 것은 최고의 자랑이요 명예입니다. 위대한 주님과 함께 걸어가시길 기도합니다.

이대원 목사(제주선교 100주년기념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