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용산구 소월로 기독교한국루터회 총회에서 지난달 28일 만난 윤득원(83) 목사는 들뜬 표정이었다. 윤 목사는 1964∼83년 초기 루터회 디아코니아 운동을 이끌었던 실무자다. 종교개혁500주년기념으로 열린 사회봉사포럼에서 오랜만에 강사로 나서 옛 일을 떠올리자 “긴장된다”며 소감을 전했다.
헬라어인 디아코니아(봉사)는 케리그마(선포) 코이노니아(교제)와 더불어 교회의 핵심 사역이다. 윤 목사는 ‘루터란 디아코니아부’에서 구호, 사회사업, 상담 등 다양한 일을 했다. 디아코니아부는 1958년 세워진 한국루터교선교부(기독교한국루터회 전신)의 한 부서였다. 부서 책임자는 노르웨이 출신의 디아콘(평신도 전문 봉사자) 레케보 선생. 통역 겸 간사인 김선회 목사와 실무자 윤 목사 등 셋이서 디아코니아부를 이끌었다. 레케보 선생은 한국에 오기 전 군장병을 치료하는 병원에서 일했다. 스칸디나비아 3국 대표로 한국에 들어와 국립중앙의료원 목포결핵병원 등을 세우는 데도 협력했다.
당시 우리나라는 6·25 전쟁 후 10여년이 지났음에도 질병이 난무했고 식량은 턱 없이 부족했다. 미군이 먹고 남은 음식으로 끓인 ‘꿀꿀이죽’을 다닥다닥 붙은 ‘하꼬방(판잣집)’에서 최고의 영양식인줄 알고 먹었다. 디아코니아부는 이런 시절, 전후 지원에 나섰던 외국 봉사단체들이 순차적으로 한국을 떠날 때쯤인 66년부터 본격 활동을 시작했다.
“레케보 선생은 ‘복음전도와 디아코니아 활동은 균형을 이뤄야 한다’고 항상 강조했습니다. 시설을 세우기보다 봉사자 양성에 힘썼는데, 이는 외국의 봉사단체들이 철수하는 상황에서 결국엔 한국인 스스로 일을 감당해야 한다고 여겼던 겁니다. 이를 위해 각 지역 루터교회에서 먼저 디아코니아 운동을 일으켰지요.”
윤 목사는 정기적으로 루터교회들을 방문해 개별상담 등을 통해 개인이나 지역 문제를 도왔다. 서울 옥수동 루터교회를 방문할 때마다 맡았던 악취를 해결하기 위해 시 당국에 의뢰해 콘크리트 하수도 공사를 했던 게 기억에 남는다고 했다.
개인이나 가정을 도울 땐 재정부터 후원하지 않았다. “어려운 이들에게 돈을 준다고 잘 살 수 있을까요. 그들에겐 예수님을 알게 하는 것과 자신감 회복이 우선입니다. 심리상태를 살펴 잠재적 능력도 키워야 합니다. 개인과 가정이 스스로 재기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죠.”
윤 목사는 디아코니아부의 결실로 ‘비헤른 봉사상’을 꼽았다. 그는 “봉사자를 더 많이 양성해 전국 교회로 디아코니아 운동을 확산시켜야 한다는 생각에서 67년 레케보 선생이 매년 4월 셋째 주일을 ‘봉사의 날’로 정해 비헤른 봉사상을 수여했다”고 말했다. 루터회는 지금도 이 상을 운영하고 있다.
윤 목사는 83년 디아코니아부를 그만두면서 현역에서 물러났다. 뒤늦게 신학을 공부해 목사안수를 받고 필요한 곳을 찾아다니며 봉사활동을 이어갔다. 평생 나눔과 섬김의 현장을 지켜온 윤 목사는 “봉사자는 상대방의 마음을 먼저 읽어야 한다”며 “봉사할 때 가장 중요한 건 배려”라고 강조했다.
글·사진=노희경 기자 hkroh@kmib.co.kr
사회봉사포럼서 강사로 나선 윤득원 목사 “복음 전도와 디아코니아는 균형 이뤄야”
입력 2017-03-06 0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