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배우 이혜영 “내게 ‘메디아’는 남자배우의 ‘햄릿’”

입력 2017-03-06 00:02
국립극단 ‘메디아’의 주연 배우 이혜영. 그는 3일 “메디아를 연기하면서 여자, 엄마, 아내로서 내 지난 삶을 다시 한 번 되돌아보게 됐다”면서 “신화를 현대적인 러브스토리로 해석한 이 작품에서 관객들이 공감할 수 있는 메디아를 보여주려고 노력했다”고 말했다. 곽경근 선임기자

“‘햄릿’이 남자 배우들에게 궁극의 작품이라면 여자 배우들에겐 ‘메디아’ 아닐까요? 사랑 모성애 복수 분노 등 다양한 감정을 극한으로 연기해야 하니까요.”

국립극단의 ‘메디아’(∼4월 2일까지 명동예술극장)는 배우 이혜영(55)의 카리스마를 드러내기에 좋은 작품이다. 메디아는 고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최고의 악녀다. 콜키스 왕녀인 메디아는 사랑하는 이아손 때문에 동생을 죽게 만드는 등 살인에 가담했다. 하지만 이아손이 출세를 위해 크레온 왕의 딸과 결혼하려 하자 광기 어린 분노로 크레온 왕 부녀는 물론 자신의 아이들까지 죽인다.

3일 서울 중구 명동예술극장에서 만난 그는 “‘메디아’에 출연하기로 결정된 후 내 인생을 새삼 되돌아보게 됐다”면서 “메디아를 연기하면서 일상의 삶에 찌들어 그동안 잊어버렸던 사랑과 열정 등 수많은 감정들이 되살아났다”며 “게다가 이번만큼 개막하기 전에 불안과 고통을 느낀 적도 없는 것 같다”고 말했다.

헝가리 출신 로버트 알폴디가 연출한 국립극단 ‘메디아’는 멀게 느껴지는 신화의 껍질을 버리고 남녀의 사랑 이야기에 집중했다. 하지만 알폴디의 각색과 해석에 대해 관객들의 반응은 호오가 엇갈린다. 특히 이아손이 메디아를 죽임으로써 자식 살해를 단죄하는 장면에 대해 비판이 많이 나오고 있다. 페미니즘이 이슈인 요즘 시대에 너무 보수적이고 가부장적인 해석을 내놨기 때문이다.

에우리피데스의 원작 희곡에서 메디아는 배신한 남편을 벌하기 위해 자식을 죽인 뒤 냉정하게 떠난다. 원래 신화에서는 메디아의 자식들이 시민들에게 죽임을 당하지만 에우리피데스가 바꾼 것이다. 남성 중심적인 고대 그리스 시대에 대를 잇는 도구로서의 여성을 부정했다는 점이야말로 ‘메디아’가 진보적이라는 평가를 받는 이유다.

그는 “솔직히 알폴디 대본의 결말을 보고 처음엔 당황했다. 나도 (원작처럼) 수레를 타고 떠나고 싶었다”면서 “작품 결말에 대해 관객들이 여러 의견을 내놓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배우는 연출가의 의도를 무대 위에서 충실하게 구현해야 할 의무가 있다. 내가 알폴디에게 메디아를 살려달라고 말할 수는 없지 않나”고 말했다. 이어 “다만 극중 내 연기에 대해선 관객의 공감을 받고 싶다. 비겁한 이아손과 비교해 타협하지 않는 메디아의 성격이야말로 이 작품의 핵심이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2012년 국립극단의 ‘헤다 가블러’로 ‘햄릿 1999’ 이후 13년 만에 연극에 복귀한 그는 지난해 ‘갈매기’에 이어 올해 ‘메디아’까지 모두 강력한 여성상을 연기했다. 무대 위에서 독보적인 존재감이 요구되는 역할에 그 이상은 찾기 어렵다는 평이다. ‘헤다 가블러’로는 동아연극상 연기상을 받았고, ‘메디아’ 역시 그의 연기에 대해서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그는 “여배우로서 내 나이에 열정을 쏟고 싶은 매력적인 역할을 맡기가 쉽지 않다. 특히 연극에 비해 TV드라마나 영화는 더더욱 없다”면서 “그동안 주로 강한 성격을 연기했지만 기회가 되면 영화 ‘길’의 젤소미나처럼 순정적인 역할도 연기하고 싶다. 잘 할 자신이 있다”고 피력했다.

글=장지영 기자 jyjang@kmib.co.kr, 사진=곽경근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