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 10인치 사각 속으로 확장되다

입력 2017-03-06 00:02
마이크로 뮤지엄 설치 전경. 높이 90㎝가 채 안돼 허리를 숙여서 통 안의 영상을 보도록 돼 있다.

‘초소형 미술관’이라고 해서 아주 작을 거라 생각은 했다. 그래도 이건 상상초월이다. 높이 88㎝의 작은 사각통이 미술관이란다. 그 안 바닥에 내비게이션 크기만 한 10인치 모니터가 있다. 이이남 한성필 김기라 피터 캠퍼스 등 국내외 13명 작가의 미디어 작품이 상영되고 있는, 이른바 ‘마이크로 뮤지엄’은 이렇듯 보잘 것 없는 외관을 하고 있었다.

모든 것이 거대화되는 스펙터클의 시대에 역발상의 실험이 서울 중구 필동 인쇄소 뒷골목에서 일어나고 있다. 필동문화예술공간 예술통은 필동 24번가 일대에 마이크로 뮤지엄을 열고 개관전으로 ‘풍경’전을 하고 있다. 지난 3일 이곳을 찾았다.

개관이라지만 성인 남자가 번쩍 들 수 있는 사각통 13개를 예술통이 운영하는 복합문화공간 코쿤홀과 남학당 사이 삼거리 곳곳에 설치한 게 전부다. 이 사각통 안에서 이이남의 ‘나비’, 김기라의 ‘떠다니는 마을-위재량의 노래’, 도로시 엠 윤의 ‘8명의 히로인즈’, 박제성의 ‘5개의 구조(The Stucture of 05)’, 이준의 ‘도축된 텍스트’ 등 영상 작품이 전시되며 서로 다른 미디어적 풍경을 연출하고 있었다.

사각통에 몸을 구부리고 집중해서 봐야 할 손바닥만한 크기의 영상작품이 관람객에게 어필할 수 있을까. 박제성 작가는 “미술작품은 스케일이 중요하다. 영화관 스크린처럼 클수록 관객이 작품에 몰입하기 쉽다. 하지만 역으로 크기가 아주 작은 데서 오는 색다른 경험이 새로운 몰입을 제공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어 “요즘 젊은 세대는 스마트폰으로 드라마를 보거나 게임을 하는 등 초소형 화면에 익숙해 있어 이런 미술 관람이 어색하지 않을 것”이라고 진단했다. 이번 전시는 5월 17일까지다(02-2276-2400)

박동훈(53) 예술통 총괄디렉터는 “이 마이크로 뮤지엄 사각통 안에는 1호짜리 아주 작은 회화 작품도 들어갈 수 있고, 도자기 조각 설치미술도 전시할 수 있다. 이번에는 미디어 전시를 열었지만, 앞으로 다른 장르도 시도해 볼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이 사각의 마이크로 뮤지엄은 어디든 쉽게 설치할 수 있어 확장성이 뛰어난 게 장점”이라며 “사각통 위에 일부러 커피를 올려놓을 수 있는 테두리를 만들었는데, 공간 자체가 관람 장소이면서 거리 쉼터 역할도 할 수 있도록 했다”고 설명했다.

박 디렉터는 광고회사 핸즈BTL미디어그룹 대표이기도 하다. 이번 마이크로 뮤지엄은 그가 필동 일대에서 추진하고 있는 ‘자투리 땅 문화사업’의 두 번째 시도다. 그는 2014년부터 필동 뒷골목의 모퉁이, 육교 밑, 전봇대를 뺀 후 방치된 땅 등 버려진 공간에 초미니 거리 미술관 8곳을 꾸며 상설전시를 하고 있다. 쓰레기 투기 장소였던 후미진 곳이 문화 향기 넘치는 산뜻한 거리미술관으로 재탄생한 것이다.

박 디렉터는 “필동은 퇴락했지만 과거에는 충무로 영화의 거리였고 출판 광고의 본산이었다”며 “자투리 공간을 잘 활용하면 옛 흔적을 간직한 거리에 순수미술로 활기를 불어넣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재개발이 아니라 재발견을 통해 구도심을 살리고자 한다”고 말했다.

필동의 거리미술관은 도심 재생 사례로 회자되면서 일반인 뿐 아니라 지방자치단체, 학계 등에서 견학 오고 있다. 지난해엔 루브르박물관 관계자도 다녀갔다. 거리 미술관 투어는 신청을 받아 매주 수, 금 오전 11시, 오후 5시 진행된다(02-2276-2400).

글·사진=손영옥 선임기자 yosoh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