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이만수 <6> 야구 헬멧·배트에 십자가…팀 선배 전도하다 뺨 맞아

입력 2017-03-06 00:00 수정 2017-03-06 08:36
1984년 스포츠 용품점 앞에 선 이만수 전 감독(왼쪽). 이 감독은 84·85년 2년 연속 KBO 골든글러브 포수상을 수상했다.

아내를 통해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을 체험하고 나니 복음을 전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다. 야구 헬멧과 배트에 매직으로 검은색 십자가를 그려 넣은 것도 그런 이유였다. 1년에 절반은 원정 경기를 다녔기 때문에 주일날 호텔로 목사님을 초청해 예배를 드렸다. 때론 후배 선수들을 교회에 데리고 가 예배를 드리기도 했다. 사찰에서 합숙훈련을 할 정도로 불교세가 셌던 삼성 라이온즈에서 말이다.

“야야, 주일 아침이다. 빨랑 일나라. 교회 예배드리러 가구로.” 잠자리에 든 후배들은 눈을 비비며 불평을 쏟아냈다. 소문은 단장의 귀까지 들어갔다.

“이만수 선수, 기도한다고 야구 잘합니까. 일요일에 후배 선수들이 푹 잘 수 있도록 좀 놔두세요. 경기 성적이 중요하지 않습니까.” “저는 기도를 하고 야구경기를 뛰면 보이지 않는 힘이 도와서 평상심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후배들에게 그 길을 알려주고 싶습니다.” “적당히 좀 하시죠.” “예, 걱정 마이소.”

놀라운 것은 그렇게 전한 복음이 수십년 뒤 결실을 맺었다는 것이다. 대표적인 예가 장효조 선배였다. “선배님, 이번 주일날 교회 가입시다.” “뭐라꼬. 이 자슥 미친나.” 장 선배의 큼지막한 손바닥이 곧바로 날아왔다. “자슥아, 어디 전도할 사람이 없어서 나한테 하나. 치아라.”

그 다음 주에도 또 전도를 했다. “내는 죽어도 교회 안 나간다. 알겠나.” 이번엔 반대쪽 뺨으로 손바닥이 날아왔다. 눈물이 핑 돌았다. 알고 보니 장 선배의 어머니는 독실한 불교신자였다. 그러니 예수님의 ‘예’자도 꺼내지 못하게 한 것이었다. ‘아, 효조 선배는 독종이구만. 하나님의 뜻이 없나보다.’

20여년이 흘러 2006년 SK 와이번즈 수석코치로 일할 때다. “만수야, 내다.” “아이고, 효조 선배님 아니십니까. 진짜 오랜만입니데이.” “만수야, 내 교회 나간다. 그리고 우리 아들이 이번에 목사님이 된데이.” “예?”

사정은 이랬다. 내겐 형수가 되는 장 선배의 부인은 시집오기 전에 교회에 다녔다. 결혼해서 교회에 나간다고 하니 시어머니가 성경을 불태우면서 교회 나가면 쫓아내겠다고 엄포를 놨다고 한다. 형수는 시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남편 몰래 아들을 교회에 데리고 다니면서 신앙훈련을 시켰다. 결국 그 아들이 목사안수까지 받게 됐고 장 선배도 형수의 손에 이끌려 교회에 나가게 됐다는 것이었다. 할렐루야!

‘아, 비록 복음을 전하다가 뺨을 맞긴 했지만 그것이 훗날 하나님의 사람을 세우는 작은 씨앗이 됐구나. 하나님은 당신의 사람을 언젠가 세우신다. 우리는 그저 전하기만 하면 된다.’ 그때 깨달은 것은 우리가 복음의 열정으로 아무리 뜨겁게 예수님을 전해도 하나님의 신적 개입이 없다면 그 누구도 주 앞에 나올 자가 없다는 것이었다.

훗날 후배한테 이런 이야기를 들은 적도 있다. “삼성 라이온즈 선수 시절에 선배님이 주일 아침마다 후배 선수들을 교회로 끌고 나가셨잖아요. 그때 은근히 ‘나는 왜 안 데려 가시나’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다. 나는 복음의 씨앗을 계속 뿌리고 있었는데, 누군가는 그 복음의 소식을 들으려했던 것이다.

1982년 시작된 삼성 라이온즈 선수생활은 97년까지 이어졌다. 그때까지만 해도 야구계에선 30세만 넘어도 노장 취급을 받았다. 32세는 ‘폐물’, 33세는 ‘시체’ 취급을 받던 시절이었다. 39세였던 나는 후배들에게 40세까지 선수생활을 하는, 프로정신을 제대로 보여주고 싶었다. 그런데 주변의 눈치는 그렇지 않았다. 어느 날 구단에서 호출이 왔다.

정리=백상현 기자 100sh@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