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성노트] 내 마음 속의 책

입력 2017-03-03 17:38
영국 펭귄북스의 페이퍼백 문고

책장을 정리했다. 일 년에 한두 번씩 도서관에 기증하고, 중고서점에 내다 팔아도 책은 꾸준히 늘었다. 꽂아 둘 자리가 부족해서 누워있어야 하는 책도 많아졌다. 정말 사랑하는 책인데도 그 얼굴을 매일매일 보지 못하고, 다른 책들 뒤에 꼭꼭 숨겨둬야만 하는 것도 있어서 안타까웠다. 때마침 서재를 옮기게 되었는데, 이삿짐도 줄일 겸 남겨둘 책과 떠나보낼 책을 과감히 나눠보기로 했다. 전공서적은 조강지처 같아서 버릴 수 없었다. 이런 책은 읽어도 연애처럼 짜릿한 맛은 없다. 그래도 곁에 두면 든든하다. 오래되었다고 함부로 대해서도 안 된다.

전공서적을 제외하고 남은 책들을 쭉 훑어봤더니 시집과 미술 서적, 곱씹어 읽고 싶은 철학책, 그리고 제목만 봐도 감동이 되살아나는 소설과 에세이가 끝까지 남았다. ‘이런 종류의 책을 남겨둬야지’라고 미리 마음먹고 있었던 건 아니다. 그저 책장에서 한권 한권 뽑아 책표지를 살갗처럼 쓰다듬어 보고, 책등을 잡고 페이지를 휘리릭 넘겨보고, 코를 대고 책 향기를 맡았다. 이렇게 하다 보니, 떠나보내도 괜찮을 책과 떠나보낼 수 없는 책으로 자연스럽게 갈라졌다.

남겨두기로 한 책들 속에는, 오은 시인의 ‘우리는 분위기를 사랑해’도 있었고, 장우진의 ‘사랑이 머무는 그림’도 있었다. 롤랑 바르트의 ‘사랑의 단상’이나 알랭 바디우의 ‘사랑 예찬’은 입에는 써도 가끔 먹어줘야 하는 약 같은 책이다. 절판되어 중고로 사야 했던 무라카미 류의 ‘사랑에 관한 짧은 기억’은 내가 썼던 책들 중 한 권의 모티브가 되기도 했다. 박민규의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를 읽고 ‘과연 내가 믿고 있는 사랑이 정말 사랑일까?’ 의심하기도 했었다. 후지와라 신야의 ‘돌아보면 언제나 네가 있었다’는 곁에 있는 평범한 한 사람, 한 사람을 어떻게 보듬고 사랑해야 하는지 가르쳐주었다.

책장을 정리하고 보니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앞으로 어떻게 살고 싶은지가 눈으로 보였다. 나의 가치관도 드러났다. 나의 신념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도 알게 됐다. 발가벗겨진 것처럼 느껴져 부끄럽기도 했다. 책과 사람은 같다. 어떤 사람에 대해 알고 싶다면 그가 읽은 책과 그의 서재에 있는 책, 그리고 그가 어떤 책을 가슴에 품고 있는지 알려달라고 하면 된다.

김병수(정신과 전문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