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승림의 인사이드 아웃] 해외로 약진하는 한국 여성 작곡가들

입력 2017-03-06 05:02
남성 중심적인 장르로 꼽히는 작곡 분야에서 한국 여성 작곡가들이 국제적인 명성을 떨치고 있다. 세계적으로 가장 각광받는 작곡가 중 한 명인 진은숙, 독일 작곡계의 거목으로 손꼽히는 박영희, 제1회 바젤 작곡 콩쿠르에서 3위에 입상한 최한별(왼쪽부터).
지난 2월 24일 한국 작곡가 최한별이 스위스에서 개최된 바젤 작곡 콩쿠르에서 3위에 입상했다. 올해 처음 개최된 이 콩쿠르는 지난 1999년 사망한 스위스 지휘자 파울 자허를 기리기 위해 설립됐다. 볼프강 림, 게오르그 프리드리히 하스 등 우리 시대 거장급 유럽 작곡가들이 심사를 맡았다. 첫 대회임에도 불구하고 심사위원들의 지명도와 메이저 콩쿠르를 압도하는 상금 덕분에 무려 700여명의 작곡가들이 몰려들었다.

국제 음악 콩쿠르에서 한국 음악인들의 약진은 물론 어제 오늘 일이 아니다. 그러나 기악 콩쿠르에 비해 작곡 콩쿠르에서는 상대적으로 입상자 수가 빈약한 편이다. 그런데 그 빈약한 명단에 올라 있는 이름들 다수가 여성이라는 점은 이채롭다. 2012년에는 작곡가 김은영이 세계 최대 규모의 현대음악 오페라축제인 뮌헨 비엔날레로부터 한국 작곡가로는 처음 오페라 위촉을 받은 바 있다.

지휘와 함께 최고의 가부장적 장르로 손꼽히는 작곡 분야에서 이와 같은 한국 여성의 약진은 눈여겨볼 만하다. 서유럽의 근대와 함께 대표적인 엘리트문화의 하나로 안착한 클래식 음악은 재산과 교양을 가진 남성 시민만을 창조의 주체로 인정했다. 클라라 슈만처럼 특출한 재능의 여성 기악 연주자들이 간혹 있긴 했지만 그들도 작곡만큼은 넘볼 수 없었다. 실제로 클라라는 작곡에서도 탁월한 재능을 발휘했지만 남편 로베르트 슈만의 반대로 꿈을 접었다. 알마 말러와 파니 멘델스존 역시 각각 남편과 남동생의 만류로 작곡을 포기했다.

20세기 들어 여성 음악가들의 진출이 눈에 띄게 확장됐지만 작곡계만큼은 여성에게 문을 쉬이 열어주지 않았다. 그런 서양 음악계에 진출하고자 시도한 한국의 여성 작곡가들은 동양인으로서의 차별까지 감수해야 했다.

윤이상과 더불어 독일음악 작곡계의 거목으로 손꼽히는 작곡가 박영희는 1994년 브레멘 예술대학교에 여성으로서, 동양인으로서 최초로 작곡과 주임 교수로 임명되며 이중 차별의 벽을 극복했다. 후배 작곡가 진은숙 또한 독일의 폐쇄적이고 보수적이며 이중적인 모습에 고생했음을 토로한 바 있다.

이들은 작곡가이기 이전에 ‘한국 여자’라는 인식을 불식시키기 위해 유럽인들보다 수십 배의 노력을 기울여 오늘날의 명성을 획득했다. 겹겹의 차별을 불사하고 고국을 박차고 해외로 나간 이유에 대해 그들은 한결같이 ‘생존을 위해서’라고 답했다. 창작에 대한 합리적인 보수가 지급되지 않는 한국 음악계보다는 그리 넉넉하지 않더라도 유럽이 물질적, 정신적 생존에 유리했다는 것이다.

이처럼 산전수전 다 겪었음에도, 그들에게 한국 작곡계는 아직도 극복하기 어려운 대상으로 남아 있다. 1999년 서울대 음대 작곡과 설립 53년만에 작곡가 이신우가 여성 최초로 교수로 임명되면서 제도상의 차별이 어느 정도 해소된 것처럼 보이지만 국내 음대 작곡과 교수의 90% 이상은 여전히 남성이 장악하고 있다.

보이지 않는 심리적 편견도 여전하다. 2009년 퀸엘리자베스 작곡 콩쿠르에서 여성 최초로 우승해 화제를 모은 작곡가 조은화는 지난해 계명대 교수직을 접고 독일로 떠나며 불안정한 삶을 선택했다. 여러 나라에서 ‘여성 최초’라는 꼬리표를 달고 승승장구중인 그들조차 버거울 만큼 고국 음악계의 유리천장은 훨씬 두껍고 견고한 것은 아닌지, 3월 8일 세계 여성의 날을 앞두고 생각해 보았다.

글=노승림 음악 칼럼니스트, 그래픽=안지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