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집회 자유 해치는 ‘알박기 집회’… 신고 96%가 ‘뻥’

입력 2017-03-03 00:00



윤모(74)씨와 연모(75)씨는 매일 8시간씩 서울 노원경찰서 민원실을 지켰다. 이들은 노원구 월계동 인덕마을 철거민이 집회를 하지 못하게 막는 일을 했다. 철거민들이 집회신고를 하러 오면 윤씨 같은 노인들이 “우리가 먼저 왔다”며 재건축조합이 먼저 집회를 신고하도록 해주는 역할이다.

재건축조합은 최근까지도 노인 4명을 고용해 교대로 24시간 동안 경찰서를 지키도록 했다. 시간당 1만원씩 최대 일당 8만원을 받는 쏠쏠한 아르바이트였다. 노인들은 이곳에서 주로 TV를 보거나 민원인과 대화하며 시간을 보냈다. 밤에는 난로를 켜놓고 의자에서 쪽잠을 잤다. 윤씨는 “딱히 고생스럽지도 않고 앉아서 용돈 번다는 생각으로 일한다”고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인덕마을 재건축조합과 철거민대책위는 집회신고 선착순 경쟁을 해왔다. 지난해 9월 조합이 윤씨 같은 상시대기 인력을 고용하면서 대책위는 경쟁에서 밀려났다. 정작 집회장소인 노원구청 앞에선 집회를 하겠다고 신고된 시간에도 노인 몇 명이 현수막을 들고 서 있거나 아예 아무 집회도 없었다고 철거민 측은 분통을 터뜨렸다. 전국철거민협회 관계자는 “인덕마을뿐만 아니라 철거민들의 집회를 막기 위해 실제로 시위를 하지도 않으면서 매일 같은 시간대에 조합 쪽에서 집회 신고를 하는 일이 드물지 않다”고 설명했다.

집회 신고만 해놓고 정작 집회를 열지 않는 유령집회, 이른바 집회 ‘알박기’가 관행처럼 이어져오고 있다. 일당을 받고 집회에 참석하는 집회 알바뿐만 아니라 집회 신고를 막는 민원실 알바까지 등장했다.

집회 알박기는 이미 도를 넘었다. 2일 경찰청에 따르면 2011년부터 2015년까지 경찰에 신고된 집회시위 604만6264건 중 96.4%인 582만9215건이 실제로는 열리지 않았다. 집회신고 건수는 갈수록 늘어났지만, 열리지 않는 비율은 여전했다. 대부분의 집회 신고가 허위인 셈이다.

탄핵 정국에서도 집회 자리 선점 싸움이 벌어졌다. 탄핵 반대 단체들이 서울 종로구 헌법재판소나 인근 지하철3호선 안국역 등 주요 장소에 집회 신고를 해놓고도 신고된 시간에 나타나지 않아 탄핵 인용을 촉구하는 집회를 방해하는 게 아니냐는 지적이 제기됐다. 대통령 탄핵기각을 위한 국민총궐기운동본부(탄기국)는 지난달 28일 종로구 경운동 수운회관 앞에서 오전 8시30분부터 오후 8시까지 집회를 하겠다고 신고했지만 당일 오후 4시 수운회관 앞에는 단 한 명의 사람도 없었다. 또 다른 탄핵 반대 단체도 오후 4시부터 1시간 동안 안국역 4번 출구 앞에서 집회를 하겠다고 신고했지만 집회는 열리지 않았다.

지난해 6월 22일 서울 서초동 서초경찰서. 서울 서초동 현대차 본사 앞에서 집회를 하려는 협력업체 유성기업범시민대책위와 이를 막으려는 현대차 직원들이 민원실에서 서로 눈치를 보고 있었다. 집회 신고가 시작되는 자정쯤부터 양측이 대기하고 있었지만, 경찰은 오전부터 와 기다리고 있던 현대차 측에 신고 우선순위를 줬다.

집회 알박기를 막기 위해 개정된 집회시위법이 지난달 28일부터 시행됐다. 신고만 해놓고 특별한 이유 없이 집회를 열지 않으면 최고 100만원의 과태료를 부과한다. 집회 알박기가 처음이면 30만원, 두 번째는 50만원, 세 번째는 80만원 식으로 과태료가 늘어난다. 그러나 과태료도 부담스러운 수준이 아닌 데다 후순위 신고자가 없거나 1명 이상이 형식적으로 집회를 열면 과태료를 피할 수 있다. 새로운 제재도 간단히 무용지물이 되는 셈이다.

이윤호 동국대 경찰행정학과 교수는 “개정 집시법은 후순위 단체가 없을 경우 유령집회를 해도 법적으로 제재할 근거가 없다”며 “하지도 않을 시위를 허위 신고하는 것은 누군가의 권익을 침해할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에 적절한 제재 강화가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글=이가현 기자 hyun@kmib.co.kr, 그래픽=전진이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