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기종의 환자 샤우팅] 아직도 머나 먼 신약접근권… 누구나 ‘설국열차’ 주인공 될 수 있다

입력 2017-03-05 19:30

2013년 7월 봉준호 감독, 송강호 주연의 설국열차가 개봉했다. 지구온난화 해결을 위해 살포했던 기후 조절물질의 부작용으로 지구에 빙하기가 찾아왔고, 인간은 1년에 지구를 한 바퀴 도는 설국열차를 타야만 생존할 수 있게 됐다. 설국열차의 각 칸은 계급으로 나뉘어져 앞 칸으로 갈수록 상류층이고, 뒤 칸으로 갈수록 빈민층이다. 춥고 배고프고 아픈 사람들이 바글대는 설국열차 맨 뒤 꼬리칸에서 17년 동안 살았던 주인공이 부조리한 현실에 맞서 반란을 일으킨다는 것이 핵심 줄거리다.

2016년 3월20일, 표적항암제을 넘어 면역항암제 시대를 예고한 MSD의 키트루다(성분 펨브롤리주맙)가 폐암과 흑색종 치료제로 식약처 허가를 받았다. 이후 또다른 면역항암제인 BMS의 옵디보(성분 니볼루맙)도 허가를 받았다. 2016년 5월13일에는 이레사·타세바와 같은 표적치료제인 EGFR-TKI 제제에 내성이 생겨 더 이상 치료 불가능한 EGFR T790M 변이 양성 전이성 비소세포폐암 환자에게 사용되는 3세대 표적항암제 한미약품의 올리타(성분 올무티닙)가 식약처 허가를 받았다. 일주일 후에 동일한 적응증으로 아스트라제네카의 타그리소(성분 오시머티닙)도 허가를 받았다.

작년 말 부작용 논란이 발생한 올리타를 제외하면 면역항암제 키트루다, 옵디보와 표적항암제인 타그리소는 말기 폐암환자들에게 좋은 치료결과를 주고 있다. 해당 환자들은 어떤 항암제부터 쓸 것인지 선택해야 하는 행복한 고민에 빠지게 됐다. 문제는 약값이다. 제약사가 사회공헌 프로그램을 진행하지만 비급여인 약값은 한달 평균 700만원∼1000만원이다. 작년 3월20일 면역항암제인 키트루다의 식약처 허가일 기준으로 벌써 만 11개월이 지났다. 현재 살아남은 말기 폐암환자들은 이미 수천만원에서 1억원 넘게 약값을 지불했다. 약이 이들을 살린 것이 아니라 돈이 살린 것이다. 지금까지 살아있는 환자 대부분은 부자이거나 든든한 민간의료보험에 가입한 말기 폐암환자들일 가능성이 높다. 많은 중산층 환자들은 빚 내고, 집 팔고, 전세금 빼서 마련한 돈으로 고액의 약값을 지불했을 것이다. 이 중 일부는 계층하락을 해 기초생활 수급자가 됐을 것이다. 또한 가난한 환자들이나 민간의료보험 미가입 환자들은 신약 혜택을 받지 못하고 상당수가 사망했을 것이다. 가난하거나 민간의료보험 미가입 말기 폐암환자들도 현재 건강보험료를 내고 있거나 과거에 냈던 우리나라 국민이다. 이들도 치료효과가 있지만 고액의 약값이 필요할 때는 건강보험 재정으로 신약 치료를 받을 수 있어야 한다. 이는 헌법상 권리이고 국가의 의무다.

폐암 신약과 관련해 면역항암제는 3월에, 표적항암제는 4월에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의 약제급여평가위원회에서 임상적 유용성과 비용효과성 심의를 한다. 이번에는 꼭 말기 폐암 신약들이 약제급여평가위원회를 통과하기 바란다. 건강보험 재정도 중요하지만 암환자의 생명이 훨씬 더 중요하다. 특히 건강보험 재정 누적 흑자가 20조원이 넘는데 생명과 직결된 신약을 기다라는 암환자를 위해 사용하는 것은 당연하다. 제약사들도 장기간 비급여로 말기 폐암환자들의 약값 부담이 커지는 만큼, 인도주의 차원에서 신약이 건강보험급여가 되기 전까지 무상공급프로그램으로 환자부터 살리도록 노력해야 한다.

신약은 건강보험이 적용 전까지는 부자와 민간보험 가입자만 탈수 있는 설국열차 맨 앞 칸이다. 빚내서 신약을 사먹거나 부실한 민간보험 가입자는 맨 끝 칸에 타고 있는 것이다. 언제 밖으로 내쳐질지 모른다. 가난하거나 민간보험이 없는 말기 암환자는 설국열차 끝 칸에도 타지 못해 모두 죽어가야 한다. 이것이 우리나라에서 효과가 좋은 신약이 식약처 허가를 받아 시판돼 건강보험 급여화가 될 때까지의 모습이다. 우리나라에서 부자이거나 든든한 민간보험 가입자가 아니라면 누구든지 ‘신약 접근권’을 주제로 한 설국열차의 주인공이 될 수 있다. 슬픈 현실이다.

안기종 한국환자단체 연합회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