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지리아 출신 오쿠이 엔위저가 전시 총감독을 맡은 2015년 베니스비엔날레 미술전은 한판 신명나는 정치 미술의 장이었다. 시위, 주가 폭락, 환경 문제 등이 미술의 소재로 적극 펼쳐졌다. 가장 강렬한 인상을 준 건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전시장에서 읽는 행위다. 자본론 읽기 퍼포먼스인 ‘자본론 오라토리오’로 센세이션을 일으켰던 그 영국 작가, 아이작 줄리언(57·사진)이 한국에 왔다.
서울 강남구 관세청 사거리 인근의 복합문화공간 ‘플랫폼엘 컨템퍼러리’에서 개인전 ‘아이작 줄리언: 플레이타임’이 열리고 있다. 표제작이 상영되는 지하 전시 공간에 들어서면 우선 압도하는 것은 총 7개의 채널을 동원한 스펙터클한 디스플레이 방식이다. 가운데 직사각형 대형 채널이 있고, 그 양 옆에서 작은 채널들이 호위하듯 펼쳐져 있다.
끝없는 사막 위 얌전한 검은 옷차림의 아시아 여성이 서 있는 게 낯설다. 그녀는 석유 부국 두바이에 돈 벌러 온 필리핀 가정부다. 화면은 이내 그녀가 일하는 두바이의 고층 아파트로 옮겨간다. 눈물이 그렁한 그녀의 눈, 외로움과 그로부터 탈출할 수 없는 삶의 무게가 얹힌 뒷모습, 그녀가 일하는 고급 아파트에 걸린 고가의 미술작품, 창밖으로 멀리 마천루가 이어진 도심…. 7개의 채널은 동시에 다시점 공간을 연출하며 주인공의 심리 속에 더 몰입하게 하는 효과를 낸다.
‘플레이타임’(2014)은 필리핀 출신 가정부, 런던의 헤지펀드 매니저, 아이슬란드 레이카비크의 작가이자 부동산개발업자 등 세 명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 세 이야기를 관통하는 주제는 자본이다. 아이들 학비 때문에 버티던 필리핀 가정부는 끝내 주인집의 비인간적 처우를 견디지 못하고 뛰쳐나간다. 그러거나 말거나 자본은 더욱 물신화된다. 그런 현실을 영화는 자본의 세계의 첨병에 서 있는 직업인들의 멘트를 통해 고발한다.
“자본은 신비롭고, 미끄럽고, 어른거리고, 잡힐 듯 잡히지 않고, 냄새 맡거나 만질 수도 없습니다.”
또 다른 출품작 ‘자본론’(2013)은 영국의 경제학자이자 사상가인 데이비드 하비가 자본론이 21세기에 갖는 의미에 대해 강연하는 걸 찍은 다큐멘터리 영상이다. 강연 중간 중간 증시 폭락을 알리는 전광판, 증권거래소 직원 등의 모습을 몽타주처럼 삽입시켜 위기와 불안감을 고조시킨다.
영국의 브렉시트 가시화, 미국 트럼프 대통령 집권 등으로 세계 불균형의 심화는 명약관화하다. 식민주의, 글로벌 자본주의, 이산과 이주 등을 소재로 삼았던 줄리언의 작품 세계는 그래서 시의적절하다. 4월 30일까지. 관람 시간 화∼일요일 오후 2∼10시.
손영옥 선임기자 yosohn@kmib.co.kr
영국 아이작 줄리언, 한국서 ‘아이작 줄리언: 플레이타임’ 개인전
입력 2017-03-02 17:5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