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이만수 <5> 대식가인 나에게 금식기도원에 가자니…

입력 2017-03-03 00:00
1984년 삼성 라이온즈 선수 시절의 이만수 감독. 이 감독은 84년 KBO 정규리그 홈런, 타율, 타점, 장타율 등 4개 부문에서 1위에 올랐다.

“만수씨, 우리 오산리금식기도원에 가요.” “머라꼬?” “이제 만수씨도 성령님을 직접 체험해야 해요.” 그때만 해도 나는 세숫대야만한 냉면 그릇에 라면을 2개씩 넣어 먹고 밥을 산만큼 떠서 푹푹 말아먹을 정도로 식성이 좋았다. 그런데 금식기도원에 들어가자니, 앞이 막막했다.

“신화씨도 알지만 내는 밥 안 묵고는 하루도 못 버틴데이. 어트케 안 될까?” 대학교 4학년 때였는데, 마침 국가대표팀에서 탈락해 마음이 허전한 상태였다. ‘그래, 기도원에 가서 장래 길이나 열어달라고 기도나 해보자.’ “그래, 가자. 고마.” 그렇게 경기도 파주로 향하는 버스에 몸을 실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도 오산리금식기도원에서는 아침 점심 저녁으로 유명 부흥사들이 복음의 순수한 메시지를 전했다. 설교를 듣다보니 10년 넘게 야구선수로 살아왔던 삶이 필름처럼 주르륵 지나갔다. 어느 순간 나는 예수의 실존 앞에 점점 다가서고 있었다. 강단에선 복음을 받아들이도록 초청하고 있었다. “지금 이 시간 주님의 초청 앞에 망설이고 계신 분 있습니까. 예수님이 오늘 죄인인 당신을 초청하고 계십니다. 오늘 이 시간 주님을 구주로 모시겠다고 결단하신 분은 자리에서 일어나십시오. 인생의 놀라운 변화가 일어날 것입니다. 네, 감사합니다. 네, 감사합니다. 어서 일어나십시오.”

“뭐해요?” 신화씨가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알았다, 고마.” 그렇게 주린 배를 붙잡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런데 희한한 일이 벌어졌다. 평생 느껴보지 못한 전율이 머리부터 발끝까지 흐르는 것이었다. ‘야, 이 느낌은 도대체 머꼬? 예수님이 살아 계시다는 신화씨 말이 진짠가 보네. 오, 주님!’

그때부터 내 삶은 확실히 변화됐다. 밥을 먹을 때도, 길을 갈 때도, 야구연습을 할 때도, 잠자리에 들 때도 감사가 넘쳤다. 스윙연습을 하다가 배가 아프면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다. 그러면 신기하게 말끔히 나았다. ‘오, 하나님! 감사합니더.’ 주님과의 첫사랑은 신화씨와 데이트만큼 달콤했다.

1982년 프로야구가 출범했다. 대구가 연고였던 내가 갈 팀은 삼성 라이온즈였다. 81년 삼성 라이온즈에서 스카우트 제의가 들어왔다. 지금도 잊지 못한다. 그해 3월 서울 동대문야구장에서 열린 프로야구 첫 개막전이었다. 마운드에는 MBC 청룡의 이길환 투수가 서 있었다.

‘주님, 제게 힘을 주세요.’ 타석에 들어가기 전 기도를 드리고 심호흡을 하며 호흡을 가다듬었다. 공은 빨랐지만 내 눈에는 뚜렷이 보였다. 중학교 1학년부터 쌓은 내공을 보여줄 때가 됐다. ‘땅!’ 공이 멋지게 좌측 라인으로 쭉 뻗어 나갔다. 프로야구 1호 안타였다. “와아∼” 거대한 함성이 터져 나왔다. 마치 웅장한 폭포 한가운데 서 있는 듯 했다.

두 번째 타석에 들어섰다. 이번엔 유종겸 투수가 마운드에 섰다. 공이 정확하게 나를 향해 파고드는 게 보였다. 힘껏 밀어 쳤다. ‘따앙!’ 공이 쭉쭉 뻗어가더니 담장을 훌쩍 넘었다. 한국야구사에 남은 프로야구 1호 홈런이었다. 그렇게 나는 프로야구 개막전부터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모든 것이 주님의 은혜였다.

결혼은 같은 해 10월 16일 대구 궁전예식장에서 했다. 야구팬들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많은 인파가 몰리다보니 경찰까지 출동했다. 예식장이 팬들로 가득차 일가친척은 들어오지도 못했다. 부모님도 바리케이드를 넘어 겨우 예식장에 들어온 뒤 화가 머리끝까지 나셨다. “만수야, 결혼식이 이게 머꼬. 친척들은 하나도 못 들어왔다카이.” 신혼집은 대구 황금동 경남아파트에 마련했다.

정리=백상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