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었다고 생각했던 아들 요셉의 초청으로 야곱은 팔레스타인 지방에서 고대 문명의 중심지였던 이집트로 이민을 갑니다. 야곱은 총리가 된 아들 덕택에 파라오를 알현합니다.
야곱은 파라오를 만나자마자 축복을 하는데, 축복은 일반적으로 높은 자가 아래 사람에게 하는 법입니다. 그런데 텐트에서 생활하며 낮은 문명생활을 하던 야곱은 조금도 주눅 들지 않습니다. 파라오는 태양신의 아들이라고 여겨지며 최고의 문명과 지위에 있던 인물입니다. 야곱이 그런 자신을 축복하자 파라오는 어이가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네 나이가 얼마냐”고 묻습니다. 야곱은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백삼십년이라”고 답합니다. 그리고 덧붙이는 말이 “내 나이가 얼마 못 되니 우리 조상의 나그네 길의 연조에 미치지 못하나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라고 답합니다.
야곱은 왜 험악한 세월을 보냈다고 고백했을까요. 그의 일생은 자신의 욕심을 이루기 위해, 그리고 자신의 것들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한 삶이었습니다. 아무것도 없던 그는 아내와 재산 그리고 사랑하는 아들을 지키려고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러나 지금 그 모든 것들이 그의 곁을 떠나갔습니다. 사랑하던 아내 라헬은 죽었고 가장 사랑했던 아들 요셉도 죽은 줄로 알았습니다. 움켜쥐면 될 것이라 생각했으나 모든 것이 떠나갔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나그네 길’ ‘험악한 세월’로 정의한 것입니다.
오늘 우리 사회의 모습을 돌아봅시다. 왜 이렇게 시끄러울까요. 왜 이렇게 허탈감과 상실감이 클까요. 모두 자기 욕심에 집착해 움켜쥐려 하기 때문이 아닐까요. 대통령 주변에 있던 수석과 참모들, 그들은 잘못된 것을 몰랐을까요. 그렇게 하면 안 된다고 그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그 누구도 간언하지 않았습니다. 책임지려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모습을 보며 우리 사회는 깊은 실망감과 허탈함을 느끼는 것 같습니다.
자신의 이익과 욕심을 따라갈 때, 필연적으로 불안과 두려움이 따라오고 험악한 세월을 보낼 수밖에 없습니다. 야곱은 이 모든 것을 경험했으며 영적으로 깨달았습니다. 이제 파라오 앞에서 당당하게 그를 축복하는 성숙한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오늘날 왜 교회가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지 못하고 그 영향력이 점점 줄어가고 있을까요. 교회도 세상을 따라가며 욕심을 따라가기 때문이 아닐까요. ‘거룩’이라는 울타리로 세상과 구별되지 않기 때문이 아닐까요.
야곱의 이후 행적을 보면 육신의 눈은 나이가 들어 점점 어두워가나 영적인 눈은 더 밝아집니다. 요셉의 아들들을 축복할 때도, 열두 아들을 축복할 때도 그의 영적인 당당함을 볼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영적인 자존감입니다. 언제 어디서나 부끄러움 없는 당당한 모습으로 사랑하며 섬기며 축복해야 합니다.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들의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낮추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찾으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들의 죄를 사하고 그들의 땅을 고칠지라.”(대하 7:14)
이 말씀을 기억하면서 당당하게 하나님의 은혜와 구원을 선포하며 살아가는 야곱 같은 그리스도인들이 됐으면 좋겠습니다.
이원석 목사(광주 운암중앙교회)
[오늘의 설교] 영적 자존감
입력 2017-03-02 00: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