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극기엔 ‘보-혁’이 없다

입력 2017-02-28 17:44 수정 2017-03-01 00:02
독립과 민주주의, 애국심, 단합을 상징하는 태극기는 역사의 고비마다 등장했다. 최근에는 대통령 탄핵 반대집회에서 시위도구로 쓰이면서 3·1절 국기 게양에 반감도 커지고 있다. 사진 왼쪽부터 1987년 부산에서 열린 6·25 평화대행진, 2002년 한·일 월드컵, 3·1절을 하루 앞둔 28일 충남 천안에서 열린 ‘2017 아우내봉화제’에서 펄럭이는 태극기.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제공, 곽경근 선임기자

3·1절을 하루 앞둔 28일 서울 강남구 한 아파트 1층부터 꼭대기까지 태극기가 펄럭이고 있었다. 이렇게 태극기가 걸린 동이 10개 이상이었다. 1층 현관 엘리베이터에는 구청의 안내문이 붙어 있었다.

‘3·1절에는 전 가정에 태극기를 달아 소중한 애국심을 표현해보는 게 어떨까요?’

예년이면 당연한 내용이었다. 이번엔 달랐다. 주민 조모(21·여)씨는 “태극기가 악용되는 요즘 같은 시국엔 갈등을 일으킬 소지도 있다고 본다”며 고개를 저었다.

3·1절을 맞아 거리에 내걸린 태극기를 보는 시선이 예전 같지 않다. 박근혜 대통령 탄핵 반대집회에서 태극기를 상징물로 사용하면서 일어난 현상이다. 서울 강남구에 거주하는 프로그래머 신모(44)씨도 “강남구 뱅뱅사거리 골목마다 태극기가 달려 있어 탄핵반대단체에서 단 것으로 오해했다”고 머리를 긁적였다. 강남구청 관계자는 “매년 3·1절을 앞두고 대로변에 태극기를 설치하는데 최근에는 예민한 시기에 자제해야 하지 않느냐는 민원도 들어온다”고 설명했다. 지난 25일 유관순 열사의 고향인 충남 천안에서는 실제 태극기를 드는 대신 카드섹션으로 ‘만세 플래시몹’을 진행했다. 서울 성북구청도 28일 3·1절 행사에서 태극기 사용을 최소화했다. 광주는 아예 3·1절 기념식에 태극기를 나눠주지 않기로 했다. 광복회는 27일 이례적으로 성명을 내고 “무분별하게 태극기를 사용해 특정한 목적을 실현하려는 것이 우려스럽다”고 밝혔다.

대한민국 국기법 11조는 태극기를 훼손하거나 혐오스럽게 사용하지 못하게 규정하고 있지만 구체적인 금지 규정이나 처벌 규정은 없다. 권은희 국민의당 의원은 “최근 집단시위 등에서 태극기 사용이 무분별하게 남발되고 있다”며 집회 시위 현장에서 태극기 사용을 제한하는 내용의 대한민국 국기법 개정을 추진한다고 밝혔다.

대부분 시민들은 태극기의 원래 의미를 잊지 않고 있다. 직장인 정모(35)씨는 “국경일에 지자체가 태극기를 다는 건 잘하는 일”이라며 “탄핵 반대집회에서 태극기가 이용된다고 원래 의미까지 오해해선 안 된다”고 강조했다. 촛불집회에 여러 번 참석했던 이아라(26·여)씨는 “태극기 자체에는 거부감이 없다”며 “오용하는 이들이 문제”라고 말했다.

태극기를 둘러싼 갈등이 태극기 탓은 아니다. 한상권 덕성여대 사학과 교수는 “태극기 자체는 국가의 상징으로 문제될 게 없지만 태극기를 앞세워서 국가주의와 전체주의로 흐르는 것은 경계해야 한다”며 “탄핵 반대집회에서 사용되는 태극기는 유신시대 국가주의의 상징으로 볼 여지가 있다”고 우려했다.

태극기는 대한민국 독립과 민주주의의 상징이다. 1919년 3월, 1945년 8월, 6·25전쟁 당시 서울 수복 때나 1987년 6월, 2002년 월드컵에 시민들은 자발적으로 태극기를 들고 나왔다. 정근식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는 “어떤 정권을 옹호하거나 권력을 행사하기 위한 것과 자발적으로 태극기를 든 건 다르다”고 짚었다.

태극기를 들고 독립만세를 불렀던 때로부터 98년이 지난 2017년 3월 1일, 서울의 중심가는 다시 태극기가 물결을 이룬다. ‘대통령 탄핵기각을 위한 국민총궐기 운동본부’는 광화문광장에서 ‘태극기집회’를 연다. 박근혜정권퇴진 비상국민행동도 촛불집회에 태극기를 들고 나오라고 독려했다.

임주언 이가현 기자 eo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