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제징용의 恨·설움… 내 땅에 그 흔적도 못 남기나

입력 2017-03-01 00:03 수정 2017-03-01 00:21
올해 99세의 김한수씨(가운데)가 28일 서울 용산역광장에서 일제식민지배 시기 자신의 강제징용 경험을 증언하고 있다. 강제징용노동자상건립추진위 제공

“아리랑 부르며 넘던 나가사키(長崎) 고개를 잊을 수 없다.”

일제강점기 강제징용을 당했던 청년이 99세 노인이 돼 3·1절을 하루 앞둔 28일 자신이 겪은 참상을 증언했다.

강제징용 노동자상 건립추진위원회가 서울 용산구 용산역 광장 앞에서 연 기자회견에서 김한수(99)씨가 찬바람을 맞으며 마이크를 잡았다. 백발의 노구에서 나온 힘찬 목소리가 마이크를 타고 울려 퍼졌다. 주름진 얼굴에는 결연한 표정이 담겼다. 눈빛은 마치 청년 같았다. 그는 70년도 더 지난 굴욕의 시간을 생생하게 기억했다.

김씨는 1943년 말 나가사키의 미쓰비시 조선소로 강제징용됐다가 일본 패전 후 돌아왔다. 황해도가 고향인 김씨는 부산까지 기차에 태워 끌려갔고 배편으로 일본 나가사키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1년여간 오징어 불린 국물에 밥을 말아 배를 채우며 방공호를 파고 항공모함 부품을 만들었다.

파이프를 불에 달궈 구부리는 작업을 하다가 파이프가 떨어지면서 엄지발가락 뼈가 으스러지기도 했다. 일본인 의사는 “발가락뼈 하나 부러진 것으로 일하는 데 지장이 없으니 가라”고 ‘처방’했다. 김씨는 “그때 ‘이것들도 사람이랍시고 밥을 먹고 살아가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제대로 걷지 못하는 김씨를 친구가 업고 숙소로 데려갔다. 산등성이를 넘던 두 사람은 서러운 나머지 아리랑 노래를 불렀다. 설움에 북받쳐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고향 생각과 나라 잃은 울분을 삭이며 고개를 넘었다.

미쓰비시 조선소 인근에 있던 군함도(하시마섬)에서는 매일같이 강제징용 노동자들이 죽어나갔다. 장례절차도 없이 시신을 화장해 연기가 끊이지 않고 피어올랐다. 일하다 죽는 게 아니면 도망치다가 바다에 빠져 죽었다. 고통스러운 기억을 전한 김씨는 이렇게 말을 마쳤다.

“우리가 과거 역사를 잘 알고 반성하고 미래를 생각해야지, 역사를 그저 덮어놓고 앞일만 보면 고꾸라지는 일밖에 없습니다.”

이창복 6·15공동선언실천 남측위원회 대표는 “강제징용은 청춘의 꿈을 안고 인생을 살아가야 할 때 전쟁터와 광산으로 끌려가 노예생활을 했던 처절한 역사”라고 말했다.

추진위는 김씨와 같은 강제징용 피해자 800만명의 희생을 기리기 위해 3·1절에 맞춰 용산역 광장에 강제징용 노동자상을 설치할 계획이었다. 용산역은 강제로 끌려온 청년들이 일본으로 가기 위해 모였던 곳이다.

국토교통부는 “국가 소유 부지라 협조가 불가능하다”며 노동자상 설치에 반대했다. 외교부도 “한·일 관계를 고려해 노동자상 건립을 반대한다”는 입장을 전했다. 제막식은 정부를 규탄하는 자리로 바뀌었다.

추진위는 “3·1만세운동의 함성이 울려 퍼진 날 조선인을 끌고 가기 위한 집결지였던 용산역 광장에 강제징용 노동자상을 건립하려 했으나 정부는 납득할 수 없는 이유를 대며 반대했다”고 비판했다. 문현군 한국노총 부위원장은 “오늘날까지 이 정부는 무엇을 했나”고 지탄했다.

일본은 강제징용의 역사마저 왜곡하고 있다. 군함도 탄광은 2015년 일본 메이지 산업혁명의 유산으로써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됐다. 민주노총과 한국노총은 지난 14일 정계·시민단체와 함께 추진위를 발족했다. 50㎝ 남짓한 작은 동상은 우리 땅에서 아직 제자리를 찾지 못했다.










최예슬 기자 smarty@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