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이만수 <3> 매일 4시간만 자고 새벽별 보며 연습

입력 2017-03-01 00:00
이만수 헐크파운데이션 이사장(가운데)이 1976년 대구상고 2학년 재학시절 동료 야구부 선수들과 함께 기념사진을 촬영했다.

띵동. “장효조 선배, 저 이만숩니다.” “야이, 미친 자슥아. 지금이 몇신데 일로 오노. 다음에 날 밝을 때 온나. 응.” 눈을 비비고 나온 선배는 어이없다는 표정이었다. 그렇게 새벽부터 선배들을 찾아가 괴롭혔다.

새벽 연습에 나갈 때면 항상 별이 반짝거렸다. 제일 반짝이는 북극성을 바라보면서 이렇게 속으로 되새겼다. ‘저 별처럼 야구계의 스타가 될 것이다.’ 지금은 야구장갑이라도 있지만 그때는 그런 것도 없었다. 배트를 들고 스윙연습을 하면 물집이 생겼다. 계속 연습하다보면 물집이 터지고 살이 짓무르면서 뼈가 허옇게 보이기도 했다. 피가 줄줄 흘러내리면 연탄재에 문질렀다. 연습하다보면 세균에 감염돼 고름이 나오기도 했다.

하루에 4시간밖에 안자고 연습을 하니 연습량이 점점 쌓여갔다. 실력이 출중하지 않았기 때문에 꾸준히 노력하는 방법밖에 없었다. 어느 순간 공을 치는데 저 멀리 쭉 뻗어나갔다. 대구중학교 감독님이 어느 날 나를 호출하셨다.

“만수, 니 투수하고 싶지 않나.” “감독님, 저는 투수보다 포수가 좋습니다.” 다들 투수를 하고 싶어 안달이 났지만 나는 투수에 별 흥미가 없었다. 하루에 200개 이상 공을 던지면 팔이 너무 아팠기 때문이다. 지금이야 투수가 팔을 보호하기 위해 얼음찜질도 하지만 그때는 그런 것도 없었다.

1974년 대구중 3학년 때는 투수로서 전국중학교문교부장관기 대회에서 우승을 했다. 그때 우수투수상을 받았다. 2학년 때 유급을 했으니 중학교 4학년 때 상을 받은 셈이다. 부산 토성중 최동원 선수가 이름을 날리던 시대였다.

대구중 졸업반이 되자 부모님은 최고의 인기를 누리던 경북고에 보내고 싶어 하셨다. 나는 경북고보다 야구 역사가 긴 대구상고에 가고 싶었다. 당시 대구에선 경북고와 대구상고가 쌍벽을 이루고 있었다. 두 학교가 맞붙는 경기가 열리면 연고전이라도 하는 것처럼 동문들이 몰려나와 모교를 응원했다. 감사하게도 대구야구협회는 대구상고의 전력이 부족하다는 판단 아래 나를 대구상고에 배정했다.

입학식부터 구타가 시작했다. 얼마나 많이 맞았던지 엉덩이를 보호하기 위해 두터운 슬라이딩 팬티 사이에 오징어를 넣어 누빌 정도였다. 때릴 때 퍽퍽 소리가 나면 때리는 선배들의 기분도 좋고 아프지도 않으니 일거양득이었다. 하지만 팬티 사이로 공기가 통하지 않는다는 게 문제였다. 바람이 통하지 않다보니 여름에 35도를 넘나드는 대구 날씨에 땀이 빠지지 않아 곤욕을 치렀다. 사타구니에는 심한 습진이 생겼다.

나는 대구상고 1학년 때부터 4번 타자로 활동했다. 포수를 하다가 공에 맞아 손가락이 으스러졌다. 제대로 치료를 받지 않아 곪았고 두 달간 병원치료를 받았다. 그래서 3월말부터 열린 대통령배 고교 야구대회에 출전하지 못했다.

다행히 5월부터 열린 제30회 청룡기 야구대회에는 참석할 수 있었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당시 서울 동대문야구장과 축구장은 한곳에 있었다. 밤에 경기를 한다고 했다. “뭐라꼬. 밤에도 야구경기를 한다고. 희한하네.” 태어나서 처음 야간경기를 치르게 됐다. 야간경기가 어떤지 궁금했다. 마침 동대문축구장에서 경기가 열리고 있었는데 차범근 선수가 맹활약을 하고 있었다. ‘이야, 이게 낮이고 밤이고. 환하네. 진짜 멋지데이.’ 축구장은 정말 대낮처럼 환했다.

드디어 시합날이 됐다. 타석에 섰는데 투수가 던진 공이 달처럼 크게 보였다. ‘땅!’ 홈런이었다. 2만명의 관중들이 일제히 우레와 같은 함성을 질렀다. 다이아몬드 그라운드를 도는데 구름 위를 걷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정리=백상현 기자 100sh@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