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새창로 12길에는 한국교회사의 축소판이라 할만한 독특한 두 교회가 나란히 자리잡고 있다. 교회 사이엔 담장도 없다. 상가 건물도 아닌 자그마한 골목길 두 예배당이 일상의 풍경처럼 편안하다. 근대식 석조예배당과 현대식 콘크리트 예배당은 영락없이 한 교회처럼 보인다. 아름드리 참나무와 석조 예배당이 잘 어울리는 곳은 용산제일교회, 흰 예배당과 적벽돌 교육관이 인상적인 곳은 도원동교회다. 각기 옛 주소로 서울 용산구 도원동 4-1과 4-3이다. 두 교회는 한국교회사의 축소판인 동시에 한국현대사와도 맞물린 곳이다.
주일이었던 26일 용산제일교회는 오전 11시, 도원동교회는 11시 30분 대예배를 시작했다. 한 시간 후 예배를 마친 교인은 위아래 교회를 오갔다. 두 교회의 뿌리는 같다. 해방 이듬 해 6월 월남한 전병욱 김금주 지윤실 등 5명이 용문동 김금주의 2층 집에서 예배를 드렸다. 실향민교회의 시작이었다. 그 해 12월 도원동 4-1번지 적산가옥 330㎡를 임대해 지금에 이른 것이다. 1966년 작성된 ‘도원동교회 약사’에 나타난 교회 설립 이유는 ‘죄악의 역사 속에서 살아온 우리 민족은 지금 국토가 양단됐으며… 이런 현실 속에서 하나님이 허락하신 인권과 신앙의 자유를 갈망하여 고향산천과 부모처자를 이별하고 자유의 땅을 찾아 하나님 제단을 쌓았다’고 적시돼 있다.
도원동은 일제강점기 용산 병참기지 배후지였다. 군부대는 물론 군수공장 등도 용산역을 중심으로 들어서 있었다. 도원동엔 일본인 고급주택이 많았고 상점과 유곽도 발달해 있었다. 지금 교회터 위로는 산비탈이어서 해방 후 월남한 이들이 판잣집을 짓고 살기 시작했다. 북한의 기독교 탄압이 심해지면서 도원동교회는 날로 부흥했다. 47년 효동교회를 분립시킬 정도였다. 50년 5월 집계에 따르면 장로 12명, 집사 56명, 교인 600여명의 조직교회로 성장했다. 그러나 그해 6월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교회는 폭격에 전소됐다. 7월 16일 주일 오전 10시 30분쯤이었다. 51년 8월 우동철 목사와 교인은 피난지에서 상경해 미군부대로부터 건축자재 등을 원조 받아 재건에 나섰고 54년 현 석조예배당(4-1번지)을 헌당했다. 여기까지가 ‘한 몸’ 도원동교회다.
한국장로교회의 분열은 신사참배 참여를 놓고 시작됐다. 신사참배를 끝까지 거부했던 이들은 고려파(현 고신측)로 갈라졌다. 이어 해방과 전쟁의 와중에 보수·진보의 성서관은 신학 논쟁을 낳았고, 여기에 지방색과 교계 지도자 간 경쟁이 겹치며 장로교 분열은 가속됐다. 이 갈등은 조선신학교 문제로 폭발했고, 53년 한국장로교 38회 총회에서 한국기독교장로회(기장)가 분파된다. 이후 한국교회는 분열에 분열을 거듭한다.
우동철 목사는 54년 8월 신(新)신학을 주창한 기장의 김재준 목사를 따랐다. 결국 우 목사와 반대 측은 석조예배당과 그 당시 공사 중인 예배당을 나누어 분열했다. 이에 따라 용산제일교회는 기장, 도원동교회는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 교파가 됐다.
분열 63년째. 세대가 바뀌었다. 반면 교회재산 문제 등은 공고화됐다. 하지만 이들은 한 뿌리라는 걸 잊지 않고 2000년대 들어 연 4회 연합예배와 연 1∼2회 연합 당회를 올린다. 창립기념일 전후로 3주 동안 연합찬양발표회 등도 갖는다. 식당과 주차장도 서로 제공한다. 청년부 등은 세대와 선대의 신앙관을 뛰어넘기 위해 연합예배에 적극적이다. 두 교회 1300여명의 교인은 몸과 성령이 하나임을 인식하고 있다. 한 몸의 최대 걸림돌인 ‘교단’ 문제를 중립지대로 극복하겠다는 의지를 보이고 있어 조만간 한국교회의 모범적 갈등 해결의 사례가 될 것으로 보인다.
글=전정희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jhjeon@kmib.co.kr, 사진=강민석 선임기자
[교회와 공간-용산제일교회와 도원동교회] 한 뿌리서 난 두 교회 다시 ‘한몸’을 꿈꾸다
입력 2017-02-28 0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