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중앙초등학교에 다니면서 집 앞에 있는 대구제일감리교회에 총 6번 갔다. 크리스마스 때 교회에 가면 빵과 노트, 연필을 줬다. 그런데 대구중학교에 들어가면서 교회는 날씨가 궂을 때마다 찾는 중요한 곳이 됐다. 사정은 이렇다.
대구중은 야구로 유명한 학교였다. 입학했을 때 학교 스피커에서 이런 공지가 나왔다. “너그들 중에 야구하고 싶은 사람 있나. 운동에 관심 있는 사람은 운동장으로 집합하길 바란다. 이상.”
당시 나는 방과 후에 유도학원을 다니고 있었다. 야구는 어떻게 하는지도 몰랐다. 훗날 청와대에서 고위직을 지낸 동급생 안모가 다가왔다. “니는 야구 안 할 끼가. 니 나랑 야구 안할래.” 친구 따라 강남 간다고 얼떨결에 운동장에 모였다.
1972년 그렇게 유니폼도 없이 야구선수 생활이 시작됐다. 처음부터 배트를 잡은 건 아니다. 선배들이 친 공이 담을 넘어가면 주워오는 일부터 했다. 그때는 야구공이 귀하던 시절이다. 공을 잃어버리면 찾을 때까지 주변을 헤맸다. 주전자에 물을 떠서 나르는 것도 일이었다.
어느 날이었다. 3학년 선배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집합. 이것들이 미쳤나. 요즘 1학년 새끼들이 군기가 빠졌네. 도대체 와 카는데. 한명씩 나와.” ‘팍 팍 팍’, 선배는 나무 배트로 사정없이 내려쳤다.
드디어 내 차례가 돌아왔다. 다리가 덜덜 떨렸다. “니는 뭐꼬.” “네, 이만수입니데이.” “엉덩이 대라.” “퍽” 한대를 맞고 바닥에 쭉 뻗었다. 별이 번쩍거렸다. 정신이 아찔했다. 4대를 모두 맞고 나니 엉덩이 살이 찢어졌다. 눈물이 났다. 태어나서 그렇게 세게 맞아본 적이 없었다. 학교에서 동문동 집까지 절뚝거리며 갔다. 오기가 생겼다. ‘그래, 나는 앞으로 10년 뒤 최고 선수가 될 끼다. 그리고 10년 뒤엔 미국 메이저리그에 진출할 끼다.’
집에 도착해 저녁을 먹는데 양반다리가 되지 않았다. 팬티가 피에 젖어 들러붙어 있었다. 눈치가 빠른 어머니가 몰랐을 리 없었다. 잠든 사이 엉덩이 상태를 확인한 것이다.
이튿날 집안이 발칵 뒤집어졌다. “내 오늘 고마 도끼 들고 학교 간다, 마.” 직업군인 출신이었던 아버지가 펄쩍펄쩍 뛰셨다. “아부지, 내가 우리나라 최고 야구선수가 될 끼니까, 조금만 참으이소.”
그때 부모님 앞에서 다짐한 게 있다. 최고의 야구선수가 되기 위해 새벽 4시에 기상을 하고 밤 12시에 잔다는 것이었다. 매일 새벽 일어나 수성못과 앞산 충혼탑을 거쳐 집까지 뛰어오면 1시간 반 정도 걸렸다. 처음엔 힘들었지만 매일 그렇게 뛰다보니 점점 익숙해졌다. 매일 학교에서 훈련을 하고 집에 와서도 밤늦게 스윙 연습을 했다. 이미지 트레이닝도 했다. 비가 오는 날에는 집 앞 대구제일감리교회로 향했다. 교회 승합차 주차공간이 있었는데, 배트를 휘두르고 공을 던지는 연습을 하기에 충분했다. 비나 눈이 올 때 훈련하기엔 안성맞춤이었다. 그렇게 교회 문턱을 자연스럽게 넘었다.
주한미군방송(AFKN) 채널에선 메이저리그 야구 중계방송이 나왔다. 입이 딱 벌어졌다. 고교 아마추어 야구가 흥행하던 한국과는 차원이 달랐다. 당시 대학생이던 누나는 일본과 미국의 야구 관련 도서를 구해 선물해줬다. ‘그래, 내 언젠가 메이저리그에 간다. 반드시 간다.’
이를 악물고 남들보다 2배 이상 연습을 한 것 같다. 그래도 실력이 늘지는 않았다. 2학년 때 유급을 했다. 당시 야구부에선 실력을 향상시킨다며 1년 유급하는 건 흔한 일이었다. 야구를 정말 잘하고 싶었다. 어떻게 하면 야구를 잘할 수 있는지 조언을 듣고 싶었다. 어느 새벽, 당시 3학년이었던 장효조 선배 집으로 뛰어갔다.
정리=백상현 기자 100sh@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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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17-02-28 0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