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본문은 어린 사무엘이 부모님의 서원에 따라 하나님께 바쳐졌을 때 성막의 환경을 설명하는 내용 바로 뒷부분에 위치해 있습니다.
행실이 나쁜 엘리 제사장의 아들들이 여호와의 제사를 멸시합니다(12∼17절). 회막문에서 수종 드는 여인과 동침합니다(22절). 이러한 소문이 백성들에게 자자하게 퍼졌습니다. 나아가 대제사장 엘리의 영적인 안목도 흐려졌습니다(삼상 3:2).
어린 사무엘은 좋지 않은 환경 속으로 들어간 것입니다.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가 이 같은 소문을 모를 리 없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신뢰했기에 아들을 엘리 제사장에게로 보냅니다.
체코의 저명한 신학자 코메니우스는 어린아이 교육의 필요성을 자연에 비유해 이렇게 설명합니다. “어린 가지는 구부리기 쉬우나 다 자란 가지를 구부리려 하면 부러진다.”
어린아이일 때 환경의 영향을 가장 잘 받는다는 말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결과가 어떠해야 하겠습니까. 세상의 논리대로라면 사무엘은 엘리의 아들들과 똑같은 사람이 돼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알다시피 사무엘은 이스라엘의 무너진 여호와 신앙을 회복하고 다윗왕국의 기초를 놓는 대제사장이요 선지자요 사사가 됩니다. 무엇이 그를 이렇게 만들었습니까. 바로 여호와 신앙입니다.
21절과 26절에선 “아이 사무엘이 여호와 앞에서 자라매”라고 말씀합니다. 히브리어 원전을 보면 ‘여호와 앞에서’가 ‘임(with) 아도나이(God)’로 돼 있습니다. 하나님과 함께 자랐다는 뜻입니다. 사무엘은 하나님과 함께 자란 결과, 엘리의 아들들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맹모삼천’이란 고사성어에서 알 수 있듯이 우리는 환경이 사람을 만든다는 가치관 속에 살아갑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조차 이런 가치관에 따라 자신의 자녀에게 조금이라도 좋은 교육환경을 만들어주고자 애를 쓰고 불법을 행하면서까지 허위로 주소지를 옮깁니다. 자녀를 위한 부모의 마음을 누가 비난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이런 세상적 가치관이 우리 삶의 기준이 돼선 안 됩니다. 우리는 예수의 피로 말미암아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환경이 사람을 만든다는 가치관의 틀 안에서 움직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이 사람을 만든다고 말씀합니다. 요셉이 애굽의 총리가 되기 위해 노예로 보내진 곳은 애굽 왕 바로의 시위대장 집이었고 감옥이었습니다.
다윗은 이스라엘의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기 전 사자와 곰이 출몰하는 광야에서 아비의 양떼를 쳤습니다. 기름부음을 받은 후에는 왕으로 훈련받기 위해 미치광이 사울 왕 밑으로 보내졌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하나님의 구속사에 아름다운 이름으로 남아 있습니다. 우리 자녀와 가정과 교회가 어떤 환경 속에 있느냐가 우리의 내일을 결정하는 게 아닙니다. 그 환경 속에서 우리와 함께하시는 그분에 의해 내일의 우리가 결정됩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심으로, 말씀에 뿌리박은 믿음 위에서 세속에 물들지 않은 거룩한 주의 백성으로 살아갈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박관용 목사(금산 대산교회)
[오늘의 설교]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신앙
입력 2017-02-28 0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