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1958년 9월 3남1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대구에서 줄곧 자랐지만 본적은 서울 서대문구 신촌동 66번지로 돼 있다. 부모님은 이북분이다. 6년 전 돌아가신 아버지는 직업군인이셨는데 의무상사였다. 함경북도 출신으로 6·25전쟁 때 홀로 남한으로 오셨다. 아버지는 명절 때만 되면 고향을 그리워하셨다. 월남전 참전용사였던 아버지는 4남매에게 늘 군인정신과 승부욕을 강조했다. “절대 거짓말 하지 마라. 안되면 되게 하라. 무조건 1등이 되어야 한다. 최고가 아니면 시작도 하지 마라. 정리정돈 철저히 해라. 지금부터 30분 뒤 점검하겠다. 실시!”
올해 81세인 어머니는 평양 출신이다. 덩치도 크고 생활력도 강해 여걸 스타일이었다. 집안 형편이 풍족한 편은 아니었다. 대구중앙초등학교 4학년 때 아버지가 제대를 하고 일시불로 받은 연금으로 대구 동문동에 정육점을 차렸다. 생활력이 강한 어머니는 집안 살림도 하면서 정육점을 운영했다. 지금처럼 절단기가 있던 시절이 아니기에 아버지는 고깃덩어리를 통나무에 올려놓고 도끼로 내리치곤 하셨다. 집에 가면 언제나 비릿한 고기 냄새가 났다.
그때는 끼니도 잇기 힘든 시절이었다. 하지만 정육점을 운영한 부모님 덕에 고기를 실컷 먹을 수 있었다. 어머니는 매일 사골국을 끓여 4남매에게 먹였다. 제일 싫었던 것은 선짓국과 소의 위인 ‘양’이었다. 피가 뚝뚝 떨어지는 선지와 고약한 냄새가 나는 양을 먹지 않으려고 도망 다녔던 기억이 난다. 그렇게 매일 고기와 사골국을 먹었으니 얼마나 힘이 좋았는지 모른다. 훗날 내가 포수를 하면서 상대 선수들과 부딪혀도 끄덕 없었던 것도 이때 쌓았던 체력 덕분이다. 성장발육이 왕성한 유년기 때 영양보충을 충분히 해야 평생 밑천이 된다는 것을 실감했다.
초등학교 입학 전부터 덩치가 크고 힘도 좋아 골목대장을 도맡았다. 친구들은 우리집에 오는 것을 좋아했다. “만수야, 오늘 니 뭐하노. 느그집에 놀러가도 되나.” 올 때마다 삼겹살 파티가 열렸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친구들이 올 때마다 풍족하게 고기를 내오셨다. 도시락 반찬도 항상 고기였다. 점심시간만 되면 항상 내 주변에 아이들이 몰렸다. 어머니는 영양공급이 부족해 얼굴에 버짐이 핀 주변 친구들에게 그렇게라도 고기를 먹이고 싶으셨던 것이다.
처음부터 야구를 했던 것은 아니다. 취미삼아 일주일에 2∼3회 유도 도장을 다녔다. 아버지는 내가 권투선수가 되길 바랐다. 아버지는 새벽 4시에 나를 깨워 권투도장으로 끌고 가셨다. “만수야, 니는 권투를 해야한데이.” 링에 올라갔다. “퍽퍽.” 상대선수의 주먹이 사정없이 날아왔다. 정신이 없었다. “아버지, 지는 절대 권투 못합니더.”
어릴 때 제일 좋아했던 것은 운동회와 손야구 개념인 ‘찜뽕’이었다. 운동회에서 달리기를 하면 1등이었다. 야구가 뭔지는 몰랐지만 고무공을 손으로 쳐내고 전력 질주하는 찜뽕의 재미가 쏠쏠했다.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 것은 초등학교 6학년 때 만난 박동희 선생님이다. 선생님은 60명의 학생들에게 탑 모양을 그리라고 했다. “여러분, 정성스럽게 쌓은 탑은 절대 무너지지 않습니다. 하루하루 성실하게 노력하면 언젠가 높은 탑을 쌓을 수 있어요.” 집 앞에는 제일감리교회가 있었다.
정리=백상현 기자 100sh@kmib.co.kr
약력=△1958년 서울 출생 △대구상고, 한양대 졸업 △82년 삼성 라이온즈 입단 △99년 미국 시카고 화이트삭스 코치 △2011년 SK 와이번스 감독 △한국야구위원회 프로야구 20년 통산 포지션별 최고스타 포수부문, 라오스 국민훈장 수상 △헐크파운데이션 이사장 △인천 은혜의교회 안수집사
[역경의 열매] 이만수 <1> 고깃집 둘째 아들 손야구 ‘찜뽕’에 빠지다
입력 2017-02-27 00: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