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선주의 작은 천국] 신명나는 교회

입력 2017-02-25 00:00
정월 대보름 들녘에서 사람들이 짚단에 불을 붙이며 쥐불놀이를 시작하고 있는 모습.
일 년 중 달이 가장 크고 밝게 떠오르는 때가 정월 대보름입니다. 우리 동네는 올해도 어김없이 마을 사람들이 모여 달집 태우기를 하며 한바탕 신나게 놀았습니다. 청솔가지를 산더미처럼 쌓고 그것에 불을 질러 불의 향연을 즐겼습니다. 그리고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풍물을 칠 때 아이들은 펄쩍펄쩍 뛰며 신나게 까불었습니다. 사람은 함께 어울려 놀이할 때 흥겹고 신이 나는 법입니다.

사람들이 즐거움과 흥에 취할 때 발하는 감탄사가 ‘신난다’입니다. 그런데 ‘신나다’는 ‘신명나다’의 축약형입니다. ‘신명’을 국어사전에서 찾아보면 ‘흥겨운 멋이나 기분’이란 뜻과 함께 ‘하늘과 땅의 신령’이라는 뜻도 있습니다. 한자로 신명(神明)이라고 표기합니다.

그런데 우리나라 사람들은 흥겨운 감정이나 기분을 인간의 사사로운 영역에서 찾지 않고 여럿이 함께하는 자리에서 찾았습니다. 그것도 신의 이름으로 말입니다. 이것은 우리 민족이 가지고 있는 ‘종교심’에 기인합니다.

바울은 아레오파고스에서 아테네 사람들을 향해 “범사에 종교심이 많도다”라고 연설했습니다. 바울이 칭찬한 이 ‘종교심(데이스다이몬)’은 이교적인 신앙 규범을 열심히 지키는 것을 말합니다. 이교적 신앙을 칭찬하면서 바울은 궁극적으로 아테네인의 종교심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으로 인도하려 한 것입니다.

우리나라에 처음 기독교가 들어왔을 때 빠른 속도로 복음이 퍼지고 교회가 세워질 수 있었던 것도 우리 민족의 심성 깊은 곳을 채운 종교심 때문이었습니다. 바울이 말한 종교심의 표면적 의미는 종교적 규범에 대한 열정이지만, 그것은 현상 너머에 있는 초월적 존재와 세계에 대한 이해심을 뜻하기도 합니다. 종교심은 우리 삶을 지배하는 물리적인 세계와 사건의 이면에 역사하는 절대자에 대한 갈망입니다. 그래서 종교를 ‘근원에 대한 갈망’이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 민족의 심성 가운데 내재된 종교심으로 인해 한국 기독교는 세계에서 유래를 찾아볼 수 없이 급성장했습니다. 이제는 세련되고 대형화된 교회들도 넘쳐납니다. 그런데 우리 안의 ‘흥’이 사라졌습니다. 신명이 나지 않게 됐습니다. 우리들의 교회에서 말입니다. 교회는 이제 매력을 잃어버린 것 같습니다.

며칠 전에 초등학교 졸업식에 갔는데 몇 명의 어머니들이 나를 둘러싸고 “우리 아이 좀 교회에 데려가달라”고 했습니다. 자기들은 비록 절에 다니지만 아이만큼은 그 교회에 보내고 싶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교회에 가면 뭔가 특별한 일이 기다리고 있고, 아이들이 행복해 하는 것 같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교회 다니는 아이들은 뭔가 다르다고 말합니다.

아이들과 그동안 신명나게 놀기만 했는데 아이들이 학교에 가면, 이웃마을 친구 집에 놀러 가면 하나님 자랑을 하고 “예수님이 최고”라는 식으로 떠들었던 모양입니다. 나는 절대 그렇게 가르치지 않았는데 말입니다. 아이들이 신명나게 놀 때 성령님이 다녀가신 게 분명합니다.

김선주 <영동 물한계곡교회 목사>